제조사 인수하면 고객사 이탈 시작
발주사, 기술유출 우려해 발주 중단
부품 넘어 '생산 대행'으로 영토확장
1995년 삼성자동차가 출범했다. 일본 닛산 규슈 공장의 설계도를 가져와 부산 신호공단에 생산공장을 지었다. 설계도가 동일하다보니 심지어 화장실 위치마저 닛산공장과 같았다.
대형트럭에 이어 ‘야무진’이라는 1톤 트럭을 내놓더니 계획대로 승용차 시장에 뛰어들었다. 출범 3년여 만인 1998년 3월, 마침내 첫 양산 모델인 SM5 1세대가 등장했다.
시장 초기 제품경쟁력은 단박에 현대차를 앞질렀다. 그러나 출시와 동시에 IMF 외환위기가 몰아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 2000년 9월 프랑스 르노에 회사를 매각했다.
이후 산업계는 삼성그룹의 완성차 시장 재진출 여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자동차광으로 알려진 고(故) 이건희 회장 역시 적잖은 미련이 있었다. 그러나 삼성그룹은 삼성자동차를 매각한 이후 이제껏 단 한 번도 차 시장 재진출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자동차 업계에 뛰어드는 것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앞세워 핵심 전장부품 공급사로 남아있는 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21세기 글로벌 자동차 부품사는 웬만한 완성차 제조사보다 규모가 더 크다.
삼성그룹은 2016년 자동차 전장부품업체 하만을 80억 달러에 인수했다. 우리 돈 약 9조 4000억 원이라는 대형 M&A였다.
자동차 공조장치 분야의 글로벌 톱 기업인 한온시스템(옛 한라공조)은 2018년 세계 3위 자동차 부품사인 마그나 인터내셔널의 유압 제어 사업부를 인수했다. 인수금액만 12억3000만 달러, 우리 돈 1조4000억 원에 달했다.
최근 에디슨모터스 컨소시엄이 쌍용차 본입찰을 앞두고 제시했던 인수금액이 3050억 수준이었다. 이를 고려하면 부품사 또는 공급사의 규모들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완성차 부품업계의 규모와 자금력은 웬만한 제조사를 가볍게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막대한 자금력과 경영능력, 체계화된 시스템,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췄음에도 결코 완성차 회사 인수·합병에 뛰어들지 않는다. 자동차 부품사가 자동차 제조사를 인수하면 남아있는 고객사와 공급계약이 끊어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동차 대형 부품사의 경우 단순한 부품공급 차원을 넘어 생산 대행 체제를 갖추기도 한다.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최적의 대안이기도 하다.
캐나다의 자동차 부품사 마그나는 전 세계 23개국에 생산설비가 있다. 이곳에서 생산한 자동차 부품을 사실상 글로벌 주요 완성차 제조사 전체에 납품하고 있다.
마그나는 오스트리아에 그라츠(Graz) 공장을 두고 이곳에서 완성차를 대신 생산하기도 한다.
한때 미국 크라이슬러의 유럽 수출 버전(일부 디젤모델)은 마그나가 이곳 공장에서 대신 생산해 유럽으로 보냈다. 혀를 내두를만한 조립 기술력을 인정받으면서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의 초호화 SUV를 대신 생산하기도 했다.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당장 현대차그룹의 부품계열사 현대모비스도 미국 현지에서 생산 대행을 십수 년 째 이어오고 있다. 지프 랭글러의 픽업 모델의 언더보디는 현대모비스가 생산한다. 이를 모듈로 만들어 통째로 납품한다.
이처럼 자금력과 규모가 넉넉한 자동차 부품사들이 제조사 인수전과 철저하게 담을 쌓는다. 경영권과 무관한 재무적 투자자(FI)조차 거부한다.
자칫 자동차 제조사 하나를 인수하려다 공급처 수백 곳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