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은 총재 "빅스텝 필요성 크지 않아"→ "가능성 배제할 수 없어"
지난달 17일 이 총재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에서 “한국은 한번에 0.25%포인트를 넘게 큰 폭으로 기준금리를 조정할 필요성이 크지 않다”라며 빅스텝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8월부터 선제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했다는 이유에서다. 한은은 지난해 8월부터 지난달까지 4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연 0.5%에서 연 1.5%로 올렸다.
16일 이 총재가 기존의 발언을 뒤로하고 빅스텝 가능성을 연 건 최근 물가와 환율 상황 등 경제 환경이 심상치 않은 탓이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3월 10년 만에 4%를 넘어선 데 이어, 지난달에는 전월 수준(4.1%)을 크게 웃도는 4.8%를 기록했다. 2008년 10월(4.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원ㆍ달러 환율은 미국의 공격적인 긴축과 중국발(發) 봉쇄 쇼크 등으로 금융위기 수준인 1300원대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의 물가 상승률이 8%대까지 치솟은 가운데, 미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빅스텝이 본격화될 경우 자금 유출과 환율 급등세는 더 빨라질 수 있다.
한은도 ‘빅 스텝’을 하나의 선택지로 열어뒀다는 뜻으로 읽힌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최근 물가 상승률이 크게 높아지고 앞으로도 당분간 물가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지속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통화정책을 결정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예를 들면, 국제유가 상승이나 환율뿐 아니라 최근 인도의 밀수출 금지조치와 같이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향후 물가 전망의 불확실성이 매우 큰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이 빅스텝 가능성까지 열어두며 향후 금리인상 시그널을 줬지만,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다. 급격하게 금리를 올리면 경기 침체와 금융 시장 불안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은의 ‘가계신용(빚)’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카드 사용액(판매신용)을 제외한 가계대출만 1755조8000억 원에 이른다. 또 같은 달 기준 예금은행의 가계대출 전체 잔액 가운데 76.1%는 변동금리 대출이었다.
산술적으로 대출금리가 기준금리와 마찬가지로 0.25%p 오르면 대출자의 이자 부담은 연간 3조3404억 원(1755조8000억 원×76.1%×0.25%)이나 불어나는 셈이다. 빅스텝을 강행한다면 이자 부담은 두 배로 늘어난다.
지난달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한 달 사이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변동금리의 기준이 되는 코픽스(COFIX·자금조달비용지수)가 0.12%p 올랐다. 이날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4월 신규 취급액 기준 코픽스는 3월(1.72%)보다 0.12%p 높은 1.84%로 집계됐다.
시중 은행들은 당장 17일부터 신규 주택담보대출 변동금리에 이날 공개된 4월 코픽스 금리 수준을 반영하게 된다. 한은이 추가 금리 상승을 예고하고 있어 대출금리 오름세는 더 가파를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미국과의 금리 차이가 역전되고, 물가가 더 크게 치솟는 등의 상황이 온다면 빅스텝도 불가피하다고 본다. 다만 금융시장 충격을 막기 위해 점진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이번 달 (빅스텝)은 아닐 것 같다”며 “5월 소비자물가, 6월 소비자물가가 크게 뛴다면 7월쯤에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의 금리인상이 빨라지거나, 이로 인해 한미 금리 역전 우려가 발생한다면 어쩔 수 없이 빅스텝을 해야하는 부분도 있다”면서 “그렇지만 가장 좋은 건 빅스텝을 안 하고 점진적으로 올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빅스텝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는다”면서 “미국으로 인해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고 있는 데다 가계부채 문제까지 고려하면, 우리는 베이비스텝으로 서서히 금리를 올리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환율 흐름 및 외환시장 상황도 빅스텝 금리 인상 여부의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한은은 금리차 역전만으로 자본유출이 본격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지만, 앞으론 금리 결정에서 환율 문제를 전략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금통위원은 지난 4월 회의에서 “그동안 금리 경로에 대한 논의 시 국내 요인을 주로 반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대외여건의 변화와 그에 따른 외환부문의 압력에 대해서도 전략적으로 반영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