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은 스웨덴 출신의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연출한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TRIANGLE OF SADNESS)’라는 영화다. 난파한 크루즈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렬한 풍자극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주인공이 없다는 것이다. 단일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여러 국적과 직업의 인물들이 크루즈와 무인도에서 겪게 되는 일들을 통해 현실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다.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프랑스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파리-뉴욕 간 여객기가 석 달이라는 시간 차이를 두고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일을 겪게 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다시 말해 시공간의 오류로 인해 똑같은 사람들이 탄 똑같은 비행기가 두 번 착륙한다는 황당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 SF 소설이다.
소설에는 청부 살인 업자, 소설가, 뮤지션, 변호사, 건축설계사, 영화 편집인 등 8명의 다양한 국적과 직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전대미문의 사건을 통해 자신과 똑같은 나를 대면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텔리에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제각기 펼쳐 보이면서 ‘인간 실존’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형상화한다.
2일 오후 2시 서울국제도서전 방문차 한국에 온 텔리에는 국내 언론들과의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소설을 쓰게 된 동기에 관해 “늘 나 자신과의 대면에 대해서 골몰했다”며 “‘내가 나를 대면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텔리에는 1957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현재 국제적 실험 문학 집단인 울리포(OuLiPo)의 회장을 맡고 있다. 2020년 여덟 번째 장편 소설 ‘아노말리’로 공쿠르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말처럼 ‘아노말리’는 나와 똑같은 나를 대면하면서 겪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텔리에는 “일반적인 소설은 한 명의 주인공이 있고, 그가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는 일들을 담아내는데, 나는 그 반대로 시작했다. 말하자면 8명의 각각 다른 인물들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아노말리’는 다양한 인물만큼이나 다양한 장르가 혼재된 소설이기도 하다. 텔리에는 “인물들의 특성에 맞게 장르를 달리하면서 썼다. 예를 들어 청부 살인 업자의 이야기는 스릴러의 법칙을 지켜가면서 글을 썼는데, 이렇게 각각의 인물들의 특성에 부합하는 장르로 쓰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아노말리’는 평균 40만 부라는 공쿠르 수상작 판매 부수를 훨씬 뛰어넘어 프랑스에서만 110만 부 이상 판매됐다. 또한 미국, 영국, 독일, 중국, 일본 등 전 세계 45개국에 출판됐다. 지난달 26일에는 한국에도 정식 출판됐다.
소설의 제목인 아노말리(anomaly)는 ‘변칙’이라는 뜻이다. 제목에 관해 텔리에는 “속되게 얘기하면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지금의 세상과 공명하는 제목인 것 같다. 어찌 보면 무미건조한 제목인데, 코로나 시국을 만나 그렇게 재해석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끝으로 텔리에는 ‘기생충’, ‘오징어 게임’, ‘부산행’ 등을 언급하며 한국 영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특히 ‘부산행’을 정말 재밌게 봤다. 개인적으로 좀비가 나오는 주제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좀비 자체가 주제가 아니라 좀비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어서 참 좋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