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엔까지 추락할 경우
1997년 아시아외환위기 버금가는 충격
일본 엔화 가치가 추락하고 있다. 달러·엔 환율은 20년래 최고치를 경신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엔화 가치 추락세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와 닮았다고 지적한다. 중국이 일본 엔화의 계속된 약세 흐름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9일 엔화 가치는 달러당 134.56엔까지 밀렸다. 2002년 4월 이후 최저치로, 엔 가치는 올 들어 14% 하락했다.
일본 금융당국이 높은 인플레이션에도 저금리 기조를 고수하면서 다른 주요국과 금리 격차 확대를 방관한 결과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3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 데 이어 5월에도 한 번에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밟았다. 5월 소비자물가 역시 40년래 최고치인 8.3% 상승으로 전망돼 추가 빅스텝 가능성을 키운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물가 상승률이 8%를 돌파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자 제로금리 시대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밝혔다. ECB는 7월 0.25%포인트 인상을 시작으로 9월 ‘빅스텝’ 가능성도 열어뒀다. ECB가 3개월 내 두 번이나 금리를 인상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반면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완화적 통화정책 유지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최근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경제 회복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긴축은 고려 대상이 아님을 재확인했다.
연준에 이어 유럽까지 매파로 돌아서면서 일본 장기금리만 유일하게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유럽 국채수익률은 ECB의 금리인상 전망에 8년 만에 플러스 전환했다.
짐 오닐 이코노미스트는 “엔 가치가 추가 하락해 달러ㆍ엔 환율이 150엔에 도달하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수준의 충격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오닐은 아시아금융위기 당시 골드만삭스의 통화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다.
아시아 외환위기는 1997년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를 계기로 동남아시아의 통화 위기가 세계 경제로 번진 사태를 말한다.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가치가 폭락하고 금융시스템이 마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태국 금융위기를 목격한 시장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위험하다고 판단, 전격적인 투자금 회수에 들어갔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한국으로 유동성 위기가 번졌고, 통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외채 부담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오닐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엔화 추락 상황이 아시아 외환위기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국 당국의 개입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엔 약세가 지속되면 중국은 이 상황을 불공정한 경쟁우위로 여길 것”이라며 “통화 평가절하로 자국 경제가 위협받는 걸 지켜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엔 약세는 수출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서 다른 국가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갖도록 만든다. 중국이 자국의 수출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엔 약세를 바라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위안화 가치는 미국 금리인상, 도시 봉쇄 장기화 여파로 최근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다. 지난 4월 4% 넘게 떨어졌고 5월에도 약 1% 하락했다. 4월 위안화 가치 낙폭은 블룸버그 집계 기준 월간으로 역대 최대였다.
엔화 가치 폭락이 아시아 다른 국가들의 통화 가치 연쇄 하락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중국을 자극한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미국, 일본은 중국에 위안화를 평가절하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위안화 평가절하가 다른 국가로 연쇄반응을 일으켜 줄줄이 통화 가치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됐고 중국은 위안화의 하단을 페그(고정)시켜 붕괴를 막는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