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출신으로 할리우드에 안착한 정정훈 촬영감독은 자신의 현재 입지를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14일 미국 현지에서 스타워즈 시리즈 ‘오비완 케노비’ 촬영감독 자격으로 온라인 인터뷰에 응한 그는 “더 이상 ‘한국에서 온 촬영감독’이라는 특별 대우는 없기 때문에 더 냉정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촬영감독은 한국 촬영감독으로서는 유례없이 왕성한 해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03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로 전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렸고, 2013년 ‘스토커’로 할리우드를 처음 경험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올드보이’를 찍은 새로운 촬영감독이라고 하니 '이방인의 시각으로 같이 일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특이한 관점에서 제안이 왔다”고 기억했다.
2017년 촬영한 공포영화 ‘그것’이 북미에서 흥행 대박을 터뜨리면서 정 촬영감독은 미국에서 완전히 자리 잡았다. ‘그것’은 3억 3000만 달러(한화 약 4245억 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며 역대 북미 박스오피스 R등급(17세미만 보호자동반 관람가) 공포영화 1위 자리에 올라설 만큼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이후 상업적 감각이 뛰어난 루벤 플레셔 감독이나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잘 알려진 에드가 라이트 감독과 작업하며 경쟁력을 키웠다. ‘호텔 아르테미스’, ‘커런트 워’, ‘좀비랜드: 더블탭’, ‘언차티트’, ‘라스트 나잇 인 소호’ 등 색감이 화려하고 리듬감 있는 영상의 작품을 연이어 선보였다.
디즈니+에서 스트리밍되는 ‘오비완 케노비’에 합류하면서 한국인 중에서는 최초로 스타워즈 시리즈 촬영감독이 됐다. 정 촬영감독은 예상외로 ‘스타워즈’ 시리즈를 ‘정주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스타워즈(만을 위한 연출)뿐 아니라 ‘잘 만들어진 드라마’를 끌어나갈 수 있는” 데보라 초우 감독과도 작업 성향이 잘 맞았다고 한다. ‘오비완 케노비’에서도 “캐릭터를 많이 공부하고 어떻게 보일지 계획을 짜는 감독의 스타일이 좋았다”고 했다.
앞으로의 한국 영화 작업 계획을 물었다. 그의 한국 작품은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마지막이다.
“현지 스케줄이 끊임없고, 가족도 함께 미국에 와 있다 보니 내가 (일터를) 옮기면 같이 옮겨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 불편할 때가 있다”고 설명한 그는 한국을 비운 동안 발전한 국내 촬영기술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했다. 아직 개봉 전인 최동훈 감독의 SF물 ‘외계+인’과 박찬욱 감독의 로맨스 수사물 ‘헤어질 결심’ 예고편을 대표적으로 손꼽았다.
6편의 작품을 함께한 박찬욱 감독과는 “기회가 되면 무조건 같이할 것”이라고 했다. ‘헤어질 결심’으로 올해 칸영화제에 감독상을 수상한 뒤에도 축하 전화를 했고, 박 감독이 업무차 미국을 찾으면 “어디에 모실지”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라며 “가족 같은 분”이라고 애정을 표했다.
정 촬영감독은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둔 후배들에게 영어 실력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자신도 “언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는 “호주, 뉴질랜드 쪽 촬영감독들이 한국 인력에 비해 특별히 나은 것이 없을 때도 영어권이다 보니 (작품에) 쉽게 접근할 때가 있다. 재능을 펼치는 데 언어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같이 준비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정 촬영감독의 올해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다. 관객이 가장 빠르게 만날 작품은 티모시 샬라메가 출연하는 ‘웡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속 캐릭터 윌리 웡카 이야기로, 이미 촬영을 마친 뒤 후반 작업 중이다. 하반기에는 ‘라스트 나잇 인 소호’로 합을 맞췄던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신작에 합류할 예정이다.
정 촬영감독은 “아무 작품을 하기 보다는 좋은 작품을 골라야 하는 과도기에 접어든 시기”라고 했다. “쉴 새 없이 달려온 만큼 이제는 가족과 아이들도 신경 쓰면서 기회 될 때마다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성격상 그러지 못할 것 같다”며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