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등 정정 불안에 혼란 진정 조짐 안 보여
최대 경제국 인도, 다른 나라 도울 여력 없어
남아시아 국가들이 통화가치 폭락으로 사면초가에 내몰리고 있다. 스리랑카에 이어 연쇄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제기된다. 1997년 태국 바트화 가치 폭락으로 시작된 아시아 외환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올해 여름 남아시아 국가들은 유례 없는 경제위기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파키스탄은 미국 달러 대비 통화 가치가 사상 최저치로 폭락하면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경제난에 허덕이는 방글라데시 역시 IMF에 45억 달러(약 5조9000억 원) 규모의 차관 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이미 국가 부도 상태인 스리랑카는 브레이크 없는 인플레이션과 정치권 혼란에 해법을 찾기가 매우 힘든 상태다. 인도조차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루피화가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다.
남아시아의 잇단 통화가치 폭락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시아 외환위기는 1997년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를 계기로 동남아시아의 통화 위기가 세계 경제로 번진 사태를 말한다.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가치가 폭락하고 금융시스템이 마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태국 금융위기를 목격한 시장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위험하다고 판단, 전격적인 투자금 회수에 들어갔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한국으로 유동성 위기가 번졌고, 통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외채 부담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공황에 빠진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조기 상환을 요구했고 글로벌 자금은 중남미, 러시아를 포함한 신흥시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일부 국가들은 급기야 1998년 8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했다.
비영리단체 카란다즈파키스탄의 최고위험책임자(CRO)인 암마르 하비브 칸은 “남아시아 국가들은 지난 10년간 저비용으로 달러를 차입해 프로젝트를 대폭 늘렸다”면서 “분위기가 1997년 동남아시아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이상 조짐은 올해 들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에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불거졌다. 금리 인상 물결은 고물가로 허덕이던 남아시아로도 번졌다. 유동성 위기가 수면으로 떠올랐고 통화가치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8일 기준 스리랑카 루피화 가치는 올 들어 달러 대비 43.8% 폭락했다. 파키스탄 루피는 25.5%, 방글라데시 타카는 9.1%, 인도 루피 6.3% 각각 하락했다.
IMF 구제금융에 목마른 정부들이 구조 개혁 일환으로 세금 인상을 서두른 것이 정치적 소요 사태로 이어졌다. 파키스탄은 불과 몇 개월 새 경유 가격을 100%, 전력 가격을 50%가량 인상했다. 수입을 늘리기 위해 소매업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전국에 걸쳐 시위가 잇따랐다.
25년 전 중국의 역할을 남아시아 최대 경제국 인도에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 당시 중국은 위안화 하단을 고정시켜 통화가치의 도미노 붕괴를 막았다. 인도는 외환위기 이후 외환보유고를 20배가량 늘려 기초체력을 키웠다. 그러나 연준의 금리 인상과 함께 자국 통화 가치가 하락해 인도는 이웃국을 돌볼 겨를이 없다. 인도 중앙은행은 올해 국내 주식시장에서 약 290억 달러의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는 등 자본 유출에 외환보유고에서 6000억 달러를 풀어 환율 방어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