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달러 등가, 200년 만에 첫 붕괴 임박
중국 위안화·일본 엔화, 심리적 저지선 무너져
신흥국 달러 표시 부채 상환 눈덩이
1985년 플라자 합의 재연 가능성
주요 6개국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ICE달러인덱스는 올 들어 지금까지 14% 이상 올라 1985년 지수 출범 이후 최대 상승 폭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만큼 상대국 통화 가치는 곤두박질쳤다. 영국 파운드화는 올 들어 16% 하락하며 달러당 1.14파운드에 턱걸이한 채 거래 중이다. 파운드화 가치가 추가 하락해 1달러를 밑돌 가능성도 제기된다. ‘1파운드=1달러’ 붕괴는 200년 만에 처음이 된다. 이미 깨진 유로-달러의 ‘패리티(Parity·등가)’는 고착화하는 분위기다.
달러·엔 환율은 1998년 이후 처음으로 달러당 140엔대를 돌파했다. 올해 3월 110엔대에 머물던 달러당 엔화 가치는 불과 반년 새 30엔 넘게 하락하며 연간 기준 1973년 이후 최대 하락 폭을 기록했다. 중국 위안화 가치 역시 ‘포치(破七) 라인’이라 부르는 달러당 7.0위안 선이 무너졌다.
신흥국 통화는 더 추락했다. 이집트 파운드, 헝가리 포린트,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 가치는 연초 대비 각각 18%, 20%, 9.4% 빠졌다.
주요국 경제가 쏟아진 악재에 휘청거린 반면 연준이 긴축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글로벌 자금이 달러로 쏠린 결과다.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침략 전쟁이 벌어졌다. 에너지 공급 비상에 휩싸이면서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중국은 부동산 시장이 수십년 래 최악의 혹한기를 맞이한 가운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억제를 위한 도시 봉쇄로 경제활동이 멈춰 섰다.
연준은 물가가 무섭게 뛰자 올 3월 제로금리를 깨고 5월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 8월 자이언트스텝(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밟으며 뒷수습에 나섰다. 20~21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또 한 차례 자이언트스텝이 확실시 되고 있다. 달러 강세 돌풍이 더 거세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금융학 교수는 “달러 강세는 이제 시작 단계”라며 “당분간 고금리 시대가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달러가 글로벌 무역과 금융시장의 기축통화인 만큼 세계 경제는 강달러로 고통받고 있다. 스리랑카는 식품과 연료 부족에 내몰렸다. 유럽은 가뜩이나 살벌한 인플레이션 부담이 가중됐고 일본의 지난달 무역적자는 2조8173억 엔(약 28조 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신흥국들과 기업들의 부채 상환 부담도 커졌다. 32개국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금융협회(IIF) 데이터에 따르면 내년 말 만기가 도래하는 신흥국의 달러 표시 부채는 830억 달러에 달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대니얼 무네바르 이코노미스트는 “신흥국은 올 들어 갑자기 통화 가치가 30% 하락했다”며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의료와 교육비 지출 감소 압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신흥국들은 통화 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올리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금리를 75%까지 인상했고 가나 금리도 22%에 달한다. 정부의 경기부양은 사실상 물 건너간 셈이다.
달러 초강세가 길어지면서 급기야 국제사회의 개입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1985년 주요 7개국(G7)의 전신인 미국·일본·서독·영국·프랑스 등 주요 5개국(G5)은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렸다. 아문디의 파레시 우파드아야 통화전략담당 이사는 “달러 강세가 미국을 제외한 지역에 역풍을 몰고 왔다”며 “국제사회의 개입이 정당화될 여지가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