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의 지명은 과거 조선시대 자리하던 양곡창고에서 유래하였는데, 1912년 편찬된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 따르면, 양주군 해등촌면 가운데 창동리, 마산리, 유만리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창동리로 합쳐졌으며 1963년 노해면이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창동이 되었다. 과거 서울 창동 초등학교 옆 공터에 창동리 이정표가 있었으나 1995년 창5동 주민센터 옆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민자역사 설립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서도 현재까지 주민들을 위해 묵묵히 일해온 현재의 창동역사는 길조인 학의 모습을 조화시킨 벽화를 통해 옛 창동 들녘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2016년에는 1번 출구에 인접한 환승주차장에 건립된 ‘플랫폼 창동 61’을 통해 음악과 푸드, 패션의 콘텐츠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으로 탄생하였으며 서울시의 핵심 사업인 서울 아레나 사업 등으로 창동 지역이 주목을 받으면서 새로운 창동역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독립운동가의 거점지역이었던 창동역. 이런 창동역 일대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2016년 관내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평화상 세우기 서명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뒤이어 2017년 창동에 거주하였던 독립운동가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의 창동 3사자(獅子)상과 창동역사문화공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1920년대 동아일보는 ‘양춘(陽春)의 낙원 우이동’이라는 기사로 당시 우이동의 벚꽃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다. 구한말 사학자 문일평의 유고집 ‘호암전집’에 따르면, 우이동에 벚나무는 조선시대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면서 궁재(벚나무껍질로 만든 활의 손잡이 마감재)로 사용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실제 조선시대 벚나무 껍질은 중국 등 해외로의 밀반출이 금해졌을 만큼 귀중한 물건이었다.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던 벚꽃이 사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자료=국가철도공단 ‘한국의 철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