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 총리가 20일(현지시간) 사임을 발표한 후 시장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파운드·달러 환율은 1.13달러까지 올랐다. 오전 한때 4%를 웃돌았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3.76%까지 하락했다가 소폭 상승했다.
폴 데일스 캐피털이코노믹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트러스 사임으로 리더십에 공백이 생겼지만, 일단 시장은 안도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트러스의 최단기 재임 기간 동안 영국 금융시장은 패닉에 휩싸였다. 높은 인플레이션 파고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금리인상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가운데 트러스가 들고 나온 초대형 감세안이 화근이었다. 트러스 신임 총리는 지난달 23일 450억 파운드(약 72조원) 규모 감세안이 포함된 미니 예산을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영국이 시장 중력을 거스를 수 있다고 믿었던 게 트러스의 치명적 오판이라고 지적한다. 영국 인플레이션이 두 자릿 수를 기록하고 금리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지출 삭감 없이 감세안을 내놓은 건 시장 논리에 맞지 않다는 의미다.
조너선 포티스 킹스칼리지 런던 경제학 교수는 “2010년대처럼 금리가 낮았을 때와 지금은 다르다”며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재정정책이 결합됐다”고 지적했다.
트러스는 자유시장 전도사로 오랫동안 명성을 쌓아왔다. 2012년 공동 저술한 ‘브리타니아 언체인드’는 대처리즘에 입각한 자유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트러스는 책에서 영국인을 세계 최악의 게으름뱅이로 묘사했다가 뭇매를 맞기도 했다.
트러스는 시장이 감세보다 더 광범위한 글로벌 추세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벌이며 금리인상을 놓고 씨름하고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코로나발 수요 급증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몰고 온 가스 가격 급등 등 외부요인이 촉발한 것이라는 얘기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 경제학과 교수는 “트러스가 한 모든 게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원인이 국내에 있다는 걸 알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 정말 걱정되는 것은 세계적으로 금리가 계속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 상황이 탄광의 카나리아가 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탄광의 카나리아는 다가올 문제를 미리 경고해주는 사람이나 매개체를 지칭할 때 사용한다. 영국의 시장 혼란이 다른 국가에서도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영국이 늦어도 28일 새 총리를 결정할 예정인 가운데 관건은 시장 신뢰를 얼마나 빠르게 회복하는가에 달렸다. 영국 정부는 예정대로 31일 중기 재정계획을 발표한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서는 다음 총리가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지출을 줄이고 엄격한 재정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가 펼쳤던 엄격한 긴축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도 커지고 있다.
영국의 정치·경제적 혼란이 회복될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포티스 교수는 “다른 사람이 배(영국)을 몰 수는 있지만 현 보수당 상태를 고려하면 어떤 총수라도 보수당이 입은 타격을 회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전망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영국을 이탈리아, 그리스 등 재정적으로 낙후된 국가들과 동급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신흥국이 스스로를 가라앉는 시장(submerging)으로 빠트리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혹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