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리시 수낵(42) 전 재무장관이 총리로 선출됐습니다. 수낵 총리 확정 이후 국채 금리는 하락, 파운드화 가치는 상승하며 영국 금융 시장은 안정세를 보였습니다.
수낵 총리 내정자를 수식하는 타이틀은 화려한데요. 영국의 첫 유색인종 총리이자, 210년 만의 최연소 총리입니다. 인도 최고 신분 계급인 브라만인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재이기도 합니다. 명문 사립고를 나와 옥스퍼드대에서 학사,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치고, 금융가를 거쳐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 인재입니다.
이외에도 여론이 그를 주목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동갑내기 부인 아크샤타 무르티입니다. 아크샤타 무르티는 ‘인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억만장자 나라야나 무르티의 딸입니다.
수낵의 부인 아크샤타는 미국 캘리포니아 사립대 클레어몬트맥케나칼리지에서 불어를 공부하고, 로스앤젤레스의 패션 대학 FIDM에서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세계 4대 회계법인 중 하나인 딜로이트와 다국적 기업 유니레버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밟았죠.
수낵과는 스탠퍼드대 MBA 과정 중 만나 2009년 결혼했습니다. 정치인, 사업가, 크리켓 선수 등 1000여 명의 하객이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했지만, 인도 부유층 기준으로는 수수하게 치러진 편입니다.
아크샤타는 억만장자의 딸임에도 겸손한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받습니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수낵과 아크샤타의 만남을 집중 조명하며 “아크샤타가 결코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 않았기에 동료들도 그가 상속녀라는 것을 눈치챌 수 없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아크샤타의 겸손함의 배경에는 자수성가를 이룩한 아버지 나라야나 무르티가 있다고 합니다. 아크샤타를 낳을 당시에는 먹고 사느라 힘들어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못 볼 정도였다고 하죠. 이후에도 그녀의 아버지는 뭄바이에서 일하느라 오랜 기간 기러기 가족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동료 6명과 함께 IT 서비스 회사 인포시스를 공동 설립한 나라야나 무르티는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등극했습니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의 순자산은 올해 4월 기준 44억 달러(약 6조 3345억 원)에 달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성공하고 부유해진 이후에도 나라야나 무르티는 자녀들을 엄격하게 교육했다고 합니다. 아크샤타는 “아버지는 카스트(인도의 계급제)가 잘못된 제도라고 믿었고, 우리 모두가 화장실을 직접 청소하도록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아크샤타는 지난 4월 ‘비거주자(non-domiciled status)’ 신분으로 인한 세금 스캔들에 휩싸였습니다.
수낵 총리 내정자의 재산은 약 7억3000만 파운드(약 1조1387억 원)로 추산됩니다. 아크샤타가 가진 6억9000만 파운드(약 1조930억 원) 수준의 인포시스 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얼마 전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올해 추정 재산은 3억70000만 파운드(약 6025억 원)입니다. 수낵 총리 내정자 부부의 자산은 여왕의 2배 규모에 달합니다.
그런데 BBC 추산에 따르면 아크샤타는 연간 약 3만 파운드(약 4800만 원)를 내고 약 210만 파운드(약 33억 원)의 세금을 회피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 절세가 가능했던 것은 영국에 ‘송금주의 과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송금주의 과세제는 1799년 도입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 기간 해외 자산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죠.
이러한 법의 적용 대상자는 영구 거주지 혹은 주소가 영국 외부에 있는 영국 거주자 ‘non-dom’입니다. 이들은 영국 밖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영국으로 송금하지 않는 한 해당 소득에 대해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크샤타의 아버지인 나라야나 무르티는 인도인이고 아크샤타는 인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덕분에 획득한 non-dom의 지위로 수십억에 달하는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논란이 커지자 아크샤타는 해외 소득에 대한 세금을 영국에 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남편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민심 수습에 나선 것입니다.
지위와 부를 모두 갖춘 수낵 총리 내정자 부부에 대한 관심은 과거 테리사 메이 전 총리 때와 유사합니다. 제76대 영국 총리로 재임한 메이 전 총리의 2016년 취임 당시 그의 부자 남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남편 필립 메이는 1조4000억 달러(약 1600조 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미국계 금융사 ‘캐피털 그룹’에서 일하는 금융인이었죠.
메이 총리 부부 때보다 재산 규모가 더 커진 만큼, 사람들의 관심도 더욱 집중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4일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수낵 총리의 가장 두드러진 인상으로 ‘부자’를 꼽았습니다.
이에 대해 맨체스터대 정치학 교수 로버트 포드는 “부자가 정치적 결격사유는 아니다”라며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부자도 많다”고 했습니다. 다만 “유권자들이 우려하는 건 부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 규칙을 바꿀까 봐이다”라며 “부인이 비거주자이고, 세금 탈루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세금을 잘 내면 괜찮은 데, 안 내면 정말 짜증난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내외가 특권층으로 자라났다는 점 또한 반대자들에게는 불만 요소입니다. 수낵 총리 내정자가 1년 등록금이 5만2000달러(약 7473 만원)가 넘는 600년 전통의 윈체스터 칼리지를 졸업했다는 사실 등이 불만에 불을 지핍니다. 지난 여름 총리 선거 당시에는 수낵이 “노동자 계층 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영상이 돌기도 했습니다.
존슨·트러스 내각을 거치면서 영국 보수당은 집권 12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수낵 총리 내정자가 위기 정국을 타개할지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막대한 재력을 가진 그의 처가에 대한 관심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