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승 전 대한법무사협회장, 법학박사
이런 우리에게도 주권을 빼앗겨 고통을 당한 때가 있었다. 서른여섯 해 동안 일제가 우리 강산을 강점해서다. 다른 식민에서와 달리 무단통치와 차별적 동화정책으로 일관한 일제다. 우리 말, 우리 글, 한글식 이름 사용을 금지하면서 민족혼을 지워 없애려 했다. 청년들은 태평양 전장으로 내몰렸고, 소녀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끌려가 위안부를 강요당했다. 자유, 인권은 사치에 불과했고 통제, 감시와 갖은 수모가 따랐다.
식민지 민족으로 산다는 것이 어땠는지는 상상만으로도 두렵고 처연하다. 남의 침략으로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던 백범의 말에서 식민의 통한을 짐작할 수 있겠다. 수많은 선열이 독립을 위해 산화해 갔지만, 누구 하나 억울해하는 이 없었다. 그 길을 영원한 쾌락이나 죽을 자리로 여기던 우리 민족이었다. 그런 선열이기에 유해 없는 가묘 앞에 서면 한없이 가슴이 먹먹해지고 무명독립용사 위령탑이 그렇게 드높아 보일 수 없다. 비통한 역사는 이기심에 물들어가는 후손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국권을 회복한 지 한 세기가 다 되어 가는데도 가해자는 사죄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되레 자신이 저지른 어두운 역사를 외면하면서 변명을 늘어놓기에 급급하다. 유대인 대학살 나치의 전범행위에 대하여 피해자와 이스라엘에 계속하여 용서를 구하고 수백억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해 온 독일의 경우와 대비된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도 일본의 인색한 사과를 꼬집고 있다. 그는 공식적 사과야말로 과거의 상처를 감싸고 도덕적·정치적 화해의 기초가 되며 희생자와 후손의 후유증을 줄이게 된다고 한다. 두 나라의 관계에서 왜 반드시 사과가 먼저여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전범들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하고 참배하면서 2차 피해를 유발하고 있다. 피해자와 피해국들에 대한 모독행위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주권을 되찾은 후에도 불행한 시간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을 겪은 국민은 잘 헤쳐왔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항거한 4·19 민주혁명이 그랬고, 신군부 쿠데타 세력의 헌정질서 파괴에 항거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그랬다. 근래 들어서는 국정농단 의혹사건에 대한 광화문 광장의 촛불시민혁명이 또 그랬다. 이 모두 국민이 유권자로서가 아닌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자신을 드러낸 것이었다.
헌법 전문은 대한국민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을 계승함을 선언하고 있다. 거기에는 독립된 국민주권의 소중함과 독립국가로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주권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몇 년 전 헌법재판소가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헌법 조항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과 국민이 주권자라는 제1조가 뽑혔다. 국가는 주인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정중하게 예우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진다.
내가 이 나라 주인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일이 없었다. 나를 대신할 국가경영자를 직접 선택하기에 당연히 그 의무를 무겁게 여길 줄 알았다.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 29일 밤에 있은 이태원 참사에서였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자 K-한류 문화강국에서 청춘들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져 가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우리 아들딸들은 핼러윈 데이를 기리며 즐기는 동안 국가가 그들을 지켜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날 그 시간 그곳에 국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158명의 희생이 그 빈자리를 메웠다.
국민에게 국가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10·29 참사 69일째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주권자로부터 국가경영을 위임받은 정부가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