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귀성길 부모님들의 얼을 빠지게 하는 자녀들의 주소. ‘○○시 ○○구’ 앞 주소보다 더 긴 아파트 이름에 고개를 젓게 되는데요.
나름의 규칙이 있다고 하지만, 이토록 어렵게(?) 아파트 이름을 짓는 이유는 뭘까요.
나날이 길어진 아파트 이름은 ‘25자’까지 늘어났습니다. 전국에서 이름이 가장 긴 아파트는 전남 나주의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 1차와 2차인데요. 울산의 ‘울산블루마시티서희스타힐스블루원아파트’ 처럼 20자 넘는 곳은 이미 여럿이죠.
아파트 이름은 건설사 브랜드명에 지역명, 입지환경을 나타낸 외국어, 거기에다 어필 키워드까지 더해졌는데요. 예를 들어 ‘동탄시범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는 ‘동탄시범다은마을’이란 지역명에 ‘월드건설산업(브랜드명: 월드메르디앙)’과 ‘반도건설(브랜드명: 반도유보라)’이 함께 건설한 아파트란 뜻입니다.
부동산 정보 조사 업체 ‘부동산인포’에 따르면 2019년 분양된 전국 아파트 이름의 평균 글자 수는 9.84자로, 4.2자였던 1990년대보다 두 배 이상 늘었는데요.
아파트 브랜드 ‘고급화’와 맞물려 그 이름은 날로 길어지는 중입니다. 마치 외국인들의 미들네임 추가와 비슷하죠. 특성 반영을 넘어 다른 아파트보다 월등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데요. 하지만 각종 다양한 외래어가 추가되며 ‘정체불명’ 아파트 단지 이름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입지 반영은 ‘포레스트’, ‘퍼스티지’, ‘센트럴’, ‘파크’, ‘프레스티지’, ‘리버’ 등이 대표적인데요. 근처에 숲, 공원, 호수 등이 있으면 으레 추가되는 키워드들입니다. 심지어 강이 없어도 ‘리버’가 붙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야 집값이 오른다는 주민의 요구사항이 포함된 경우죠. 영어만 추가되면 그나마 다행인데요. 이탈리아어 루체(luce·빛), 독일어 하임(heim·집), 라틴어 움(um·공간), 불어 오트(haute·고급) 등이 합쳐진 경우도 많습니다.
요즘 트렌드는 ‘숫자’입니다. 세계적 부호들이 거주하는 맨해튼 미드타운에는 번지수를 넣은 타워들이 많은데요. 최근에는 서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남 초고가 아파트로 불리는 강남구 청담동 소재 ‘PH129’도 129번지 펜트하우스라는 뜻인데요. 한남동 ‘나인원한남’ 역시 한남대로 91이라는 도로명 주소를 활용했습니다.
주민도 외우기 힘든 이름이다 보니, 가족이나 지인은 찾아올 수 없는 곳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요. ‘시부모ㆍ처부모가 찾아오지 못하게 어려움 이름의 아파트로 이사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죠.
논란이 거듭되자 서울시는 작명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권고했습니다. 재건축·재개발 과정에서 쉬운 우리말 이름을 지으면 표창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건데요.
1960~70년대 근대화 시기 수도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하자, 당국에서는 아파트 이름에 외래어를 쓰지 못하도록 규제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1974년에는 아파트 이름을 외래어로 사용할 경우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기도 했죠. 장미아파트, 개나리아파트, 은하아파트 등이 이때 지어진 아파트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과거 독재정권 때처럼 아파트 이름을 간섭하는 것이 맞냐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죠.
아파트 이름을 바꾸는 ‘태그갈이’도 있습니다. 이 또한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건데요. 구축 아파트들에 새 브랜드명을 붙여달라는 거죠. 2002년 준공한 대우드림타운은 2006년 ‘영등포푸르지오’로 이름을 변경했고 1995년 준공한 서울시 영등포구 삼성아파트는 ‘래미안당산1차’로 간판을 바꿨습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반대의 경우인데요. LH 공공분양주택의 경우에는 입주예정자들이 아파트명에서 ‘LH’를 지워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LH는 이미지 쇄신과 고급화를 외치며 브랜드명을 ‘안단테(ANDANTE)’로 바꿨는데, 이 또한 거부당하고 있죠.
이 모든 건 집값 때문인데요. 아파트 이름이 집값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부동산분석학회가 발행한 ‘명칭 변경 사례를 통해 살펴본 아파트 브랜드 프리미엄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아파트 명칭을 인지도가 더 높은 브랜드로 변경한 경우 명칭을 변경하지 않은 주변 아파트보다 약 7.8%의 가격 상승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논문은 “긍정적인 명칭 변경 효과는 브랜드와 연관된 경우에만 유의하다”며 “지역명과 연관된 경우에는 명칭 변경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나타내지 못했다”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