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난해 말 반도체특별법(K-칩스법)의 핵심인 조세특례제한법을 개정해 반도체 설비투자 세액공제율을 대기업 기준 6%에서 8%로 2%포인트(p) 찔끔 올리며 실망감을 안겼다. 경쟁국들의 각종 보조금, 세액공제에 한참 못 미쳤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미국, 대만 기업들과 싸워야 하는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상실감은 더 컸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 투자에 대해 최대 25%의 세액공제 등 5년간 약 68조 원을 지원하는 ‘칩스법’(반도체와과학법)을 제정했다. 이달 말 미국 상무부는 칩스법 보조금 신청 조건, 방법, 일정 등 세부사항을 발표한다. 다만 미국이 10년간 중국에 공장 신·증설 투자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보조금을 지원하는 만큼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는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중국은 2025년까지 1조 위안(약 183조 원)을 투입하는 ‘반도체 굴기’를 준비 중이다.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인 TSMC를 보유한 대만은 반도체 기술개발 투자액의 25%를 세액공제하기로 했다. TSMC를 기술력으로 무장시켜 더욱 강한 기업으로 만들려는 의도다.
유럽연합(EU) 2030년 반도체 자립을 목표로 투자액의 20~40%를 보조금 형태로 기업에 돌려주는 정책을 마련했으며 의회 승인을 앞두고 있다.
1980년대부터 약 10년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다 쇠락한 일본은 부활을 꿈꾸고 있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설비 투자에 드는 비용의 최대 3분의 1을 보조하기로 했다. 10년 이상 자국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조건만 맞으면 기업의 국적도 따지지 않기로 했다. 지난해 추가경정예산으로 마련한 1조3000억 엔 중 3686억 엔(약 3조5000억 원)을 투입한다.
한국은 어떤가. 대기업 기준 투자 세액공제 8%가 전부다. 반도체가 국가 경제안보의 핵심 산업이 된 지 오래인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기업들만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실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에서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도 기적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1990년대 들어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수요 예측 실패, 소극적인 투자 등으로 삼성전자, TSMC와의 경쟁에서 쓴잔을 마셨다. 일부 기업이 명맥을 이어왔지만 10년 전 도시바 등이 D램 시장에서 철수하며 ‘과거의 영광’에 그쳤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의 반도체 산업도 위태롭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와 2분기 적자가 예상된다. 지난해 4분기 SK하이닉스는 10년 만에 분기 적자전환 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말 반도체 세액공제율을 최대 25%(대기업 기준)까지 확대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14일 전체회의에서 상정할 것으로 보인다. 거대 야당이 이른바 ‘부자 감세’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만큼 정부안대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위례 신도시·대장동 개발사업 비리 의혹 검찰 조사로 인한 여야의 대치 상황이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K-칩스법이 여야의 힘겨루기에 희생양이 돼서는 안 된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