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대형 세단보다 커진 준준형
안전ㆍ편의…세대 거듭할수록 차체 커져
올드카 매니아 A씨는 틈나는 대로 인터넷 중고차 사이트를 뒤진다. 그가 원하는 차는 신차급 컨디션을 지닌 매물이 아니다. 추억 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 동경했던 올드카를 찾기 위해서다. 때에 따라 역사성(?)이 크게 주목받은 일부 차종은 터무니없는 가격을 달고 중고차 시장에 나오기도 한다.
A씨가 요즘 눈독을 들이는 중고차는 1999년 단산(판매는 2000년까지)된 대우자동차 브로엄이다. 1980년 공업합리화조치 이후 현대차는 소형차를 전담했고, 기아는 상용차, 쌍용차(당시 동아자동차)는 특장차에 집중했다.
그 무렵 대우차는 고급 세단인 로얄 시리즈를 앞세워 시장을 확대했다. GM 산하 호주 홀덴 브랜드에서 고급차 기술을 들여왔고, 로얄 XQ와 프린스ㆍ살롱(훗날 브로엄이 된다)까지 여러 차종을 선보였다.
A씨는 최근 중고 매물로 나온 브로엄을 발견하고 서둘러 지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잘 보존된 브로엄을 만나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옛날 고급 대형 세단의 대명사였던 브로엄은 작은 소형 세단 크기에 불과했다.
추억 속에 자리했던 브로엄은 크고 화려하며 중후한 모습이었던 반면, 요즘 기준으로 브로엄은 왜소한 소형 세단 크기에 불과했다. 결국, 브로엄을 보고 실망한 A씨는 구매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실내공간 크기를 결정짓는 휠베이스(앞뒤 바퀴 축 사이의 거리)는 K3가 2700mm인 반면, 그 옛날 대형 세단이었던 브로엄은 이보다 짧은 2670mm다. 20여 년 전 대형 세단이 요즘 기준으로 준중형차 크기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이처럼 2000년대 들어 국산차들은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강화된 안전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좀 더 넉넉한 크기의 신차를 요구하는 고객의 목소리도 커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덩치 큰 자동차를 충분히 다룰 수 있을 만큼 엔진과 변속기 기술도 발달했다.
결국, 소형차와 준중형차 중형차, 준대형차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차근차근 차 크기를 키웠다.
현대차 아반떼는 여전히 국산 준중형차를 대표한다. 그러나 1세대 아반떼(엘란트라)와 비교하면 같은 차로 볼 수 없을 만큼 차 크기가 달라졌다.
1990년 등장한 엘란트라는 길이×너비×높이가 각각 4375×1675×1395mm 수준이었다. 30년 만인 2020년 출시한 7세대 아반떼는 길이×너비×높이가 각각 4650×1825×1420mm다. 앞뒤 축 사이에 거리인 휠베이스는 2500mm에서 무려 2720mm로 길어졌다. 1990년 쏘나타보다 2020년에 출시한 준중형차 아반떼가 더 큰 덩치를 자랑하는 셈이다.
물론 엔진도 달라졌다. 당시 엘란트라 1.6 DOHC 엔진은 최고출력 126마력을 냈다. 7세대로 거듭난 아반떼 N라인은 같은 배기량인 1.6ℓ 엔진에 과급기(터보)까지 맞물려 최고출력 204마력을 낸다.
무엇보다 차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이를 떠받혀줄 플랫폼도 중요하다. 결국, 차 크기의 확대는 지속적인 우상향 곡선이 아닌, 단계적으로 크기를 키우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새 플랫폼이 나와야 차 크기를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미 올해 첫 신차인 현대차 코나는 윗급 투싼에 맞먹는 크기를 앞세워 시장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곧 등장할 중형 SUV인 현대차 싼타페 역시 윗급인 대형 SUV 팰리세이드에 육박하는 차 크기를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2025년께 등장할 2세대 팰리세이드는 더 큰 덩치를 앞세워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덩치를 키운 자동차는 당분간 시장 트렌드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2018년 대형 SUV 팰리세이드가 몰고 온 '큰 차'의 인기가 출발점이다, 기아 셀토스 역시 윗급 스포티지에 육박하는 차 크기를 내세워 큰 성공을 거뒀다.
이처럼 향후 등장하는 국산 신차는 대부분이 이전보다 몰라보게 커진 차 크기를 강조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은 차 등급을 의미하는 세그먼트(Segment)를 파괴했다는 의미를 담아 '세그먼트 버스터'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