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추세 맞춰가는 양성평등 판례…"바뀌어야할 관습도 여전"
‘부모의 제사는 아들이 지낸다’는 원칙이 15년 만에 변경됐다. 대법원이 남녀를 불문하고 나이 많은 순으로 제사 지낼 권리를 갖는다며 판례를 바꾼 것이다. 사법부가 달라진 시대상과 성평등 인식을 반영해 차별의 벽을 조금씩 허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11일 유족 간 벌어진 유해인도 소송에서 "아들에게 제사 주재자의 우선순위가 있다"는 취지의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번 소송은 상속인들 간 ‘협의가 되지 않았을 때’ 유해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가 쟁점이었다. 두 딸을 둔 남성이 내연녀와 혼외자(아들)를 얻은 뒤 사망하자 내연녀는 협의 없이 고인의 유해를 추모공원 안치했고, 이에 본처와 딸들이 “유해를 돌려달라”며 소송을 냈다.
하지만 제사는 '아들'이 맡는 게 사회 통념이었고,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2008년 ‘장남이 제사 주재자가 되고 아들이 없는 경우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고 봤다. 이 사건의 1심과 2심 역시 아들의 편을 들어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5년이 지난 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장남·장손자 등 남성을 제사 주재자로 우선하는 것은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헌법 정신과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이어 현대사회 제사에서 남성 중심의 가계계승 의미가 상당 부분 퇴색한 점, 헌법상 개인의 존엄 및 양성평등의 이념과 조화돼야 한다는 점 등을 짚었다.
당초 200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도 김영란 전 대법관은 “장자 우선의 원칙은 현대사회에서 합리적인 기준이 될 수 없는 성별 및 연령을 기준으로 공동상속인들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이라며 소수의견을 낸 바 있다.
박한희 변호사(희망을만드는법)는 “사회 인식이나 성평등 규범에 비춰보면 장자만 제사를 이어받는 것 자체가 가부장적 제도”라며 “이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려서 바뀌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판례 변경 자체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말했다.
법원은 성차별에 대해 점진적으로 변화된 판결을 내놓고 있다. 2005년 대법원은 여성에게도 종중 회원 자격을 줘야 한다며 기존 판례를 뒤집었고, 2010년에는 성별을 이유로 종중 재산 분배에 차별을 둬선 안 된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당시 법원은 “사회 일반의 인식과 법질서의 변화에 의해 여성도 종원의 지위가 인정되고, 동일하게 권리를 누리고 의무를 부담한다”며 “종중재산을 성별만 기준으로 불이익하게 분배하는 건 성별에 의한 차별 금지 및 양성평등을 선언한 헌법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지난 2월 서울고법은 동성 사실혼 배우자의 건강보험법상 피부양 자격을 인정하며 1심 판단을 뒤집기도 했다. 재판부는 "동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사실혼과 같은 생활공동체 관계에 있다"며 "이성 관계인 사실혼 배우자 집단에 대해서만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건 차별대우"라고 지적했다.
박한희 변호사는 “고등법원이 명시적으로 성적지향 차별을 성차별로 본 건 아니지만, 미국연방대법원은 둘을 같은 개념으로 본다”며 “합리적이지 않은 차별은 용인될 수 없고, 평등을 강조한다는 취지는 관통하는 듯하다. 아버지성을 따르는 ‘부성 우선주의’ 등도 향후 바뀌어야할 관습”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