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이 일어나던 순간 오펜하이머는 관제소 안에서 기둥을 붙들고 마음 속으로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거룩한 자의 노래) 속 구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불길하고 거대한 구름이 솟아오를 때 이 중 한 구절을 인용해 ‘나는 세상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라는 독백을 남겼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실험의 성과가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기술인 핵무기 개발로 이어진 걸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오펜하이머는 핵물리학자로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앞장섰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도 관여했다. 그리고 이때 이룬 업적을 인정받아 한동안 정부와 학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에게 오는 영예와 권력을 즐긴 걸로 보인다. 일례로 무려 서른다섯 개나 되는 정부 위원회 위원으로서 공식 임무를 수행했고, 벽장에는 명예졸업장, 감사장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대신 순수한 과학적 명성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학계를 떠났던 43년을 기점으로 이후 10여 년간 오펜하이머가 발표한 과학 논문은 고작 다섯 편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중요도가 매우 떨어지는 것들이다.
현대 분자 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하고, 양자 역학적 터널 효과를 처음으로 인식하는 등 1930년대 이론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의 과학적 업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그를 학자로 간주하는 이들이 소수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1954년 오펜하이머는 전쟁을 조기 종식시킨 영웅에서 한순간에 소련의 명령을 받는 공산주의자로 몰리면서 사상 검증을 받는 청문회 피고인으로 서게 된다.
그 배경을 보면 이렇다. 1949년 구소련은 첫 번째 핵무기 실험에 성공하고, 이후 미국에선 더 강력한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를 강력하게 주장한 이는 수소 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다. 오펜하이머와 함께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텔러는 핵분열을 이용한 핵폭탄에서 핵융합을 이용한 수소폭탄으로의 발전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겼다.
이에 반해 오펜하이머는 일본의 항복 이후 원자폭탄이 인류의 미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원폭 개발이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진다. 버클리 대학의 불문과 교수이자 자신의 절친이기도 한 하콘 슈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의 혼돈스러운 감정을 엿볼 수 있다. “현 상황은 무거운 불안감 그 이상입니다. 예상했던 어려움 그 이상입니다.”
결국 그는 수소폭탄의 개발에 반대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반공산주의, 즉 공산주의자 색출을 내세운 매카시즘 광풍에 휩싸여 있었다. 이 속에서 오펜하이머의 이런 태도는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정부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하고 지지자들의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원폭 개발이란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이룬 모든 걸 잃어야 했다.
8월 초 오펜하이머의 삶을 담은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된다. 오펜하이머가 겪은 인생의 모순과 그 속에서 그가 감당해야 했던 영욕의 시간이 어떤 모습으로 담겨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