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월 열리는 에미상 시상식에서 11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미국 현지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의 이성진 감독이 한국을 찾았다. 작품의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한 그는 국내 콘텐츠 업계 관계에게 “한국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된다”고 조언했다.
16일 오전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 국제방송영상마켓(BCWW) 특별 세션에 참석한 이성진 감독은 “’성난 사람들’은 몇 년 전 내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라면서 “녹색 신호등이 바뀐 걸 보지 못한 나에게 뒤에 서있던 흰색 BMW가 멈추지 않고 경적을 울렸고, (운전석에 앉아있던) 백인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난폭운전을 시작해 나도 그를 따라 잡으려 추격전을 벌였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완성된 ‘성난 사람들’은 인생이 잘 안 풀려 모든 게 짜증스러운 상태인 한국계 노동자 대니 조(스티븐 연)가 마트에서 후진 중 강하게 크락션을 울리며 조롱하는 벤츠 SUV 운전자의 도발로 도로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 날의 난폭운전 영상이 SNS에 박제되고 두 운전자가 서로를 다시 만나게 되는 등 극적인 이야기 전개를 통해 현대인을 잠식하고 있는 분노와 우울을 설득력 있게 다루고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감독은 “’성난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아마존, 넷플릭스, HBO 등 7개 플랫폼을 대상으로 피칭을 했다”면서 “아마존과 넷플릭스가 가장 큰 관심을 보였고 서로 경쟁해 넷플릭스가 판권을 가져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야기를 쓸 때 중요한 건 ‘등장인물’”이라면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대니 조(스티븐 연)는 누구인지, 에이미(앨리 웡)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고 전했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 초등학교를 다니고, 다시 미국 옮겨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그는 “처음에는 ‘성진’이라는 이름이 썩 좋지 않았다”면서 “미국 선생님들이 출석을 부를 때, 카페 직원이 내 이름을 말할 때 늘 발음을 잘못했고 주변에서 웃었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웠다”고 했다. “내가 내 자신으로 사는 게 편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 감독으로 활동한) 커리어 중반까지도 ‘써니’라는 이름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을 따라 했다”던 그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 이후 미국 사람들이 다양성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포착했다고 한다.
이 감독은 “‘기생충’ 이후 미국인들은 봉준호 감독 이름을 발음할 때 실수하지 않는다”면서 “좋은 작품을 만들면 그들도 더는 한국 이름을 듣고 웃지 않고 그 이름을 기억할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또 “요즘 내 주변에서는 일본이나 브라질의 TV쇼, 아프리카의 영화는 잘 보지 않지만 K드라마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 K팝은 모두 즐긴다”면서 “한국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콘텐츠에서) 표현하면 미국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한국의 작가나 프로듀서가 미국에서 협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고 기회도 많아졌다”고 짚으면서 “굳이 다른 사람인 척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라. 그게 지난 몇 년간 한류가 성공한 이유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성난 사람들’ 시즌 2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요즘 미국작가조합이 파업 중이라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쉽지 않은 여건임을 설명했다.
다만 “재상영분배금(Residuals, 스트리밍에 따른 창작자에 대한 보상)과 AI 문제 등 많은 현안이 있는 만큼 무척 중요한 일”이라면서 “나도 지난 몇 달간 일주일에 한 번씩 시위에 참여하고 모금도 돕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