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방해’ 혐의 약식기소…1심 벌금형 집행유예→2심 무죄
법원 “고의성 일부 있더라도 불충분하게 심사한 은행 책임”
A 씨는 2017년 9월 온라인 구직사이트에서 경리를 뽑는 한 회사에 지원했다. 당시 A 씨의 나이는 24살. 해당 회사 팀장은 A 씨를 서울 오목교역 근처 카페로 불러 면접을 본 뒤, ‘법인 계좌를 개설해주면 일당 10만 원을 주고 직원으로 채용하겠다’고 말했다. 돈을 줄 테니 ‘대포통장’을 만들라는 제안이었다.
팀장은 정직원이 되는 과정이라며 A 씨를 속였다. 교육하는 3일 동안 하루 하나씩 자회사의 법인 계좌와 입출금카드, OTP를 발급받으면 총 30만 원이 지급된다고 했다. 팀장은 그 자리에서 A 씨에게 계좌 개설에 필요한 주식회사의 사업자등록증, 전화번호, 법인 인감도장, 위임장을 건넸다.
돈이 급했던 A 씨는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곧바로 은행으로 가 서류를 제출하고 계좌 개설을 신청했다. 은행 직원은 서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회사의 운영 상황을 확인했다. 직원과 통화한 사람은 A 씨와 면접을 본 팀장이었다.
사회초년생인 A 씨는 이렇게 대포통장 사기에 엮였다. 이 일로 A 씨는 2018년부터 사기,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 혐의로 수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후 검찰은 업무방해 혐의를 적용해 A 씨를 약식기소했다. 은행 직원을 기망해 정당한 계좌 개설업무를 방해했다는 취지다. A 씨는 검찰의 처분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1심은 A 씨에게 벌금 100만 원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서울북부지법 형사13단독 최선재 판사는 2021년 11월 “A 씨가 미필적으로나마 정당한 계좌 개설을 가장해 업무를 방해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면접 한 번 보고 계좌개설 업무를 위임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고, 일당 10만 원도 계좌개설 업무수행 대가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이어 “은행에서 계좌 계설을 거절할 경우 다른 은행으로 이동해 계좌를 만들었다”며 “이러한 은행의 확인 절차를 거치면서 A 씨는 스스로 계좌 개설 업무가 정당한 것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2심 판단은 달랐다. 같은 법원 형사항소2부(강영훈 부장판사)는 이달 10일 원심을 파기하고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A 씨에게 고의성이 없었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은행 측이 계좌 개설 과정에서 적절한 심사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봤다.
2심 재판부는 “A 씨가 몇 차례 아르바이트 경험만 있는 등 사정을 비춰보면, 계좌 개설이 다른 범행에 이용될 것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계좌 개설 당시 A 씨는 신분증 등 인적사항을 기재했는데 업무를 방해할 의도라면 신원이 직접 드러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은행 측은 신청서에 기재된 사유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로 자격 요건을 심사해야 한다”며 “이 사건 계좌가 개설된 것은 은행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으로 볼 여지가 많아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A 씨가 발생시켰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범진 변호사는 “앞서 검찰과 법원은 대포통장 개설의 경우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쉽게 인정하고 피고인에게 책임을 돌렸다면, 이번 판결은 불충분하게 심사한 은행에 책임을 돌린 것”이라며 “얼마 전 대법원도 비슷한 업무방해 혐의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보이스피싱, 대포통장 등 범죄에서 중간에 가담한 사람 대부분은 사회초년생이나 형편이 넉넉지 않은 분들”이라며 “이 사건에서 대포통장 개설을 제안한 팀장은 아직 잡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