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네덜란드가 ‘반도체 동맹’을 선언했다.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마르크 뤼터 총리와 어제 정상회담을 열고 동맹 구축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국 관계에서 반도체 동맹이 명문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향후 반도체 협력은 포괄적으로 이뤄진다. 반도체 분야의 기술격차를 유지하고 공급망 위기 시 함께 극복하기로 했다. 산업 당국은 반도체 정책을 조율하기 위한 반도체 대화 채널을 설치한다. 핵심 품목 공급망 협의체 구성도 추진한다. ‘무늬만 동맹’이 아니라 세계 반도체 공급망 재편 흐름에 대응해 친형제처럼 긴밀히 협력하는 공조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고무적이다.
네덜란드는 전략적 요충지다.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기업인 ASML 본사가 자리 잡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 2위인 NXP 등도 있다. ASML 위상은 압도적이다. 초미세화 공정에 없어서는 안 될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생산하고 있다. 한 해 생산량은 50여 대에 불과하다. 컨테이너 2개 크기인 EUV 노광장비 한 대당 가격은 3000억~4000억 원에 이른다. 돈이 있다고 아무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 견제를 받는 중국은 돈 보따리를 쥐고도 침만 삼키고 있다.
우리 반도체 간판 기업들은 세계 메모리반도체를 선도하고 있다. 하지만 비메모리 분야에선 후발주자다. 양국 정상이 어제 굳게 악수한 것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슈퍼 을(乙)’로 불리는 ASML과 이전과는 다른 파트너십을 갖게 됐다는 뜻이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 1위인 대만의 TSMC를 추격하고 있다. ASML과의 특수 관계는 큰 힘이 될 수 있다.
삼성전자 무기는 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의 초격차 기술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3나노 공정 제품을 양산했다. 3나노는 반도체 칩의 회로 선폭을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3 수준으로 좁힌 것이다. 반도체는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회로의 선폭을 가늘게 만들수록 더 많은 소자를 집적할 수 있다. 향후 게임체인저는 2나노 공정이다. 삼성전자는 ASML과 공동으로 1조 원을 투자해 수도권에 차세대 반도체 제조 기술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한다. 이 센터는 EUV를 기반으로 하는 초미세 제조 공정을 개발한다. SK하이닉스도 EUV 공정에서 전력 사용량과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기술을 공동 개발한다고 한다. 반도체 가치사슬이 튼튼해지는 형국이다.
세계 주요국은 국가 명운을 걸고 ‘반도체 전쟁’에 나서고 있다. 미·중 양국이 대표적이다. 천문학적인 보조금과 세제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한국에 밀려 자포자기했던 일본마저 최근 재기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 ‘삼성전자 보유국’이지만 메모리 1위에 안주하다가는 언제 뒷덜미를 잡힐지 모른다. 양국 동맹 구축을 잘 활용해 새로운 차원의 도약을 해야 한다. 우리 반도체 업계가 규제, 세제 등 각종 후진적인 허들에 걸려 실기하는 일이 없도록 국내 투자 환경을 차제에 전반적으로 살필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