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 창업하며 또 하나의 성공 신화 써
1984년 1월 16일 세상을 떠난 효성그룹 창업자 조홍제 회장은 무엇이든 출발은 늦었지만 기업인으로서 이룩한 성과는 대단했다.
그는 스스로 만우(晩愚)라 일컬었다.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나이 서른에야 대학을 졸업했고, 마흔이 넘어 사업에 입문했다. 쉰여섯이 돼서야 자신의 독자사업을 시작했다.
출발은 늦었지만 조 회장이 이룩한 성과는 실로 대단해 세계 500대 기업에 두 개의 기업을 올려놓는 전무후무한 경영인이 됐다.
1906년 경남 함안군 백이산 자락에서 태어난 조 회장은 청년 시절 조국의 샛별을 꿈꿨다. 중앙고보에 재학 중이던 1926년 6월 10일 순종황제 국장일을 기해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모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호세이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한 뒤 고향 친구 몇 명과 자취를 시작한다.
해방 직후, 조 회장은 친구의 동생이었던 호암 이병철 회장과 동업으로 삼성물산을 경영하면서 기업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홍콩 상인들이 물건을 싣고 한국으로 들어와 물물거래를 하는 바터(barter) 무역이 고작이었던 당시에, 홍콩에 직접 물건을 싣고 가 바이어를 찾아내어 직거래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무역 사상 처음으로 영국, 홍콩을 잇는 삼각무역 거래방식을 통해 수출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 설립을 주도하며 산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1962년, 조홍제 회장은 새로운 출발선에 선다. 효성물산을 모태로 독자사업을 시작해 조선제분, 한국타이어, 대전피혁 등 부실기업을 맡아 정상화시켰다.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산업을 물색한 끝에 1966년 동양나이론을 설립했다. 오늘날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효성의 섬유 사업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우리나라는 자체 기술로 공장을 건설하지 못하고 외국의 기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조 회장은 공장의 설계부터 시공까지 우리 기술진이 주도해 공장을 짓도록 했다. 향후 자체 설계를 통한 증설이 가능토록 해 원가 경쟁력을 높이고 지속적으로 공정 개선을 할 수 있게 했다.
이후 동양폴리에스터와 동양염공, 토프론 등 화학섬유 관련 계열사를 잇달아 설립했다. 독자적인 기술 개발 능력과 최고의 경쟁력으로 우리나라 화섬산업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1975년에는 산업 발전의 대동맥인 전력 송ㆍ배전망 선진화를 위해 한영공업을 인수해 효성중공업으로 개편하는 등 중화학공업에 진출해 20여 개의 대기업군을 거느리게 됐다.
오늘날 효성그룹은 섬유, 화학, 산업자재, 중공업, 건설, 무역, 정보통신 등 여러 산업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위상을 높여나가고 있다. 또 한국타이어는 국내 1위 및 세계 7위의 타이어메이커로서 품질과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1981년 포춘지가 뽑은 세계 500대 기업 속에는 삼성과 효성의 이름이 함께 들어있다. 조홍제 회장은 한 생애에 두 개의 기업을 세계 500대 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유일한 기업가로서 한국 기업사에 빛나는 성공 신화를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