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9.8조 배당, 현대차 63% ↑
증시 안정…경영진 유용 예방
보잉, 주주환원하다 자본잠식
배당 늘리면 투자자금 줄어들어
신용사 “기회비용 필연적 발생”
정부가 이달부터 가동키로 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또 다른 논쟁거리를 낳고 있다. 기업 투자를 막고 재무구조를 흔드는 ‘주주지상(株主至上)주의’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와 더 많은 국내외 주주들을 증시로 불러들여 기업 투자와 경영권 방어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맞선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배당과 자사주 소각 등 주주 환원을 확대하도록 상장 기업을 압박해 증시를 부양한 일본을 벤치마킹하는 내용이 중심이 될 전망이다. 작년 4월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주가를 주당 순자산 가치로 나눈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 미만인 저평가 상장사들에 기업 가치(주가)를 높이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요구했다. 이후 상장사들이 주주 친화 정책을 쏟아내며 일본 증시는 34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불이 붙었다.
애플의 2일 종가 주가순이익비율(PER)은 30.32배이고, PBR은 46.50배에 달한다. 3년 전(2020년 말)만 해도 애플은 PER(35.15배)이 PBR(33.12배)을 앞섰다. 애플은 벌어들인 이익보다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을 사외로 유출했다. 당시 3년 동안 애플은 자사주 매입 2096억 달러, 현금배당 419억 달러 등 총 2515억 달러를 주주환원에 사용했다. 같은 기간의 당기순이익 1721억 달러보다 훨씬 큰 규모의 돈을 주주들에게 돌려준 셈이다. 반면 설비투자 금액은 311억 달러에 불과했다.
배당 잔치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더 많은 주주를 불러들였고, 주가는 치솟았다. 덕분에 애플은 더 많은 돈을 투자에 쓸 수 있었다. 애플 올해도 주당 0.24달러 현금 배당을 발표했다. 배당금은 오는 12일 영업 종료를 기준으로 오는 15일 지급한다.
애플은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이 불러온 자금 선순환 사례다. ‘주주가치 제고(배당확대, 자사주 소각)→기업가치(주가) 상승→기업 성장→투자 확대→수익 증가→주주가치 확대’라는 선순환 고리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는 삼성그룹·현대자동그룹 등이 주주가치 제고에 나서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향후 3년간 발생하는 잉여현금흐름의 50%를 주주환원에 활용하고 연간 9조8000억 원의 배당금을 지급하는 기존 주주환원 정책을 같게 유지하기로 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기말 배당금을 주당 8400원으로 결정하면서 연간 총 배당금은 전년 대비 63% 증가한 주당 1만1400원으로 책정됐다. 기아는 올해 5000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취득한 뒤 그중 절반을 소각하기로 했다. 3분기 누계 기준 재무목표를 달성할 경우 나머지 50%도 추가 소각할 계획이다. KB금융, 하나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신한지주 등도 매년 배당을 강화하고 있다.
주주환원 확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물론 증시 안정 효과도 있다. 자금 압박이 적고 성장 잠재력이 큰 기업들이 배당을 확대하고 배당주기를 단축하면 투자심리를 되살린다.
‘백기사’는 경영권 방어의 든든한 우군이다. 거세지는 외국인 투자자와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권 도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ESG 투자 확산 이후 외부세력의 공세는 더 거칠어졌다.
몇몇 상장사들이 주장하는 자기자본 재투자의 명분도 약하다. 미래에셋증권에 따르면 올해 코스피 자기자본이익률(ROE) 컨센서스는 8.7%다. PBR 1배에 해당하는 ROE 10.3%보다 낮다. ROE는 자기자본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낮은 ROE는 기업의 경쟁력이 약해졌거나 경제 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기업들이 적정 배당을 한다면 밖으로 유출된 자본이 더 수익성 높은 분야에 투자될 수도 있고 배당은 자기자본의 규모를 줄여 해당 기업의 ROE를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아울러 과잉 투자를 피하고 경영진의 사적 현금 유용을 막는다는 측면 등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금융투자업계 한 최고경영자(CEO)는 “기업의 사내유보금 등 현금자산이 아직도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며 “기업 배당 확대가 가계소득의 확충과 민간소비의 증대를 유발하고 기업의 수익성 개선과 투자 확대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기대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2019년 말 보잉은 83억 달러 자본 잠식 상태에 빠졌다. 빚이 자본금보다 많아졌다는 뜻이다. 보잉은 20년 넘게 연속 흑자를 내온 우량기업이었지만 과도한 주주환원이 문제가 됐다. 보잉은 벌어들인 이익보다 더 큰 규모로 자사주를 매입했고, 배당금을 지급했다. 주주들에게 선심을 쓰느라 위기 때 쓸 수 있는 여유자금을 사내에 쌓아놓지 않았다.
한국판 ‘보잉’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재무구조(기업 신용도)를 흔들 수 있다는 걱정이다.
주주 환원 확대는 자본 지출, 인수·합병(M&A) 등 기업의 미래를 위한 투자 여력과 이자 상환 재원의 감소가 뒤따른다. 특히 국내 기업들이 주가 부양을 위해 주로 택하는 배당금 지급은 기업 자금 유출을 앞당기게 된다. 한 번 상향한 기업 배당지급액은 쉽게 변경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국내 기업들은 현금 대비 자본 지출 비중도 큰 편이다. 국내 시가총액 상위 100개 기업이 지난 10년간 영업활동으로 조달한 현금 1445조 원 가운데 자본적 지출에 활용된 비율은 82%로 전 세계 비(非)금융기업들 평균 50~60%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최종학 서울대 교수는 “배당을 늘린다는 것은 기업의 이익이 단기간 상승한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 정도 수준의 높은 이익이 발생한다는 의미”라며 “최근 경영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배당 확대는 기업의 성장을 위한 투자자금이 줄어들게 된다”라고 했다.
실제 기업의 배당은 늘고 있지만, 국내 설비투자는 둔화하고 있다. 설비투자 증가율은 고용 창출과도 밀접하게 연계된 지표로 설비투자가 늘어날수록 경제에 활력이 생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설비투자(-5.5%)는 4년 만에 가장 많이 줄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 밸류업’프로그램이 외국인 주주 배만 불리는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투자가 위축된다면 기업 경쟁력 훼손은 물론 장기적으로 제조업 공동화, 일자리 감축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가 추진하는 제도가 기업의 투자 기회를 희생시킬 정도로 과도해선 안 된다. 기업이 처한 재무 및 영업 환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보유 현금 감소는 기업 리스크를 키울 수도 있다.
파이낸스 분야 세계적 석학인 르네 스툴츠 미국 오하이오대 교수. 그는 ‘미국 기업은 왜 과거보다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을까’(2009년 9월, Journal of Finanace)라는 논문에서 미국 기업이 현금 보유를 늘리는 첫 번째 이유로 ‘현금 흐름의 리스크 증가’를 꼽았다. 과거보다 기업이 변했다는 점도 주목했다. 지난 26년 동안 자산 대비 현금 비율을 분석한 결과 재고자산과 외상매출금이 줄어들고 연구개발(R&D) 집약 쪽으로 기업이 변하면서 현금 보유 필요성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한국신용평가는 “주주 환원의 확대는 기회비용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며 “과도한 주주환원으로 원리금 상환 능력 저하가 발생하고, 제때 투자하지 못한다면 기업의 장기 경쟁력은 훼손되고, 주주 손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