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올해를 창조산업 리부팅 원년으로 선포
대학은 혁신 생태계 중심...산업과 연결이 관건
이해우 서울시 경제정책실장은 같은 걸 ‘여러 번’ 보는 걸 좋아했다. 요새 읽고 읽는 ‘춘추전국시대 이야기’ 11권짜리는 볼 때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같은 걸 ‘다르게’ 보는 것도 좋아했다.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모든 삼국지는 물론이고 중국·일본어판도 섭렵했다. 등장인물에 대한 한·중·일의 다양한 해석이 흥미롭다고 했다.
다시, 또 다르게 생각하는 ‘버릇’은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불판 위 삼겹살을 보고도 문화, 기술, 역사와 굴비 엮듯 엮었다. 의미가 ‘시즈닝’된 ‘고깃덩어리’는 어느덧 그럴싸한 ‘상품’으로 재탄생했다. “굶주림을 면하려고 먹던 천 원짜리 밥 한 끼에 의미를 부여해 가공하고 기술을 입히면 만 원짜리가 돼요. 모든 걸 재해석하고 상상력을 보태면 새로운 영역이 생겨나지요.” 14년 전 ‘오세훈표’ 창조산업의 태동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올해 수장으로 돌아온 그를 15일 집무실에서 만났다.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한 고부가가치 문화융합산업’. 사전적 정의를 해독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자, 이 실장은 미국 라스베이거스 얘기를 꺼냈다. “허허벌판이던 사막의 도시가 카지노, 전시컨벤션, 공연까지 상상하는 대로 변해 갔어요. 지난 출장길에 스피어(세계 최대 구형 공연장)를 보면서 인간의 상상력이 정말 무섭구나 느꼈지요. 9만 명 수용 가능한 얼리전트라는 미식 축구장은 공연장으로 변신해요. 새로운 개념의 축구장에서 공연도 하고 컨벤션도 하면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거예요.”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느냐를 두고 전 세계가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서울시도 베팅에 나섰다. 창조산업의 잠재성에 대한 기대감이자 절박함이기도 하다. 제조업 비중 고작 10%. 서비스업이 90%를 차지하는 서울에서 ‘상상력’은 곧 먹거리다. “제조 기반이 없는 서울의 모든 서비스를 새롭게 해석하고 거기에 IT, 인공지능을 도입하면 새로운 콘셉트의 산업이 형성됩니다. 서울의 미래를 견인하고 고용을 늘릴 수 있는 기회의 중심에 창조산업이 있어요.”
서울시는 특히 확장현실(XR), 영상, 1인 미디어, 웹툰, 게임을 5대 핵심 육성산업으로 발표했다. “만화 미생이 영화로, 드라마로, 웹툰으로 나왔고 이제 게임도 나올 수 있는 거예요. K콘텐츠와 신기술을 융합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정책적 지원이 필요해요.” 세계 창조산업 시장 규모는 3366조 원까지 불어났다. 특히 한국의 콘텐츠 산업은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에 이어 7위에 오를 만큼 경쟁력이 높다. 서울시 집중육성 산업인 XR, 게임, 웹툰 분야는 2026년까지 연평균 12.5%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속 성장의 구심점이 될 인프라는 내년부터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XR/스토리센터·게임콘텐츠창조허브(상암), 창조산업허브(남산), 뉴미디어창업허브(목동), 서울영화센터(충무로)가 줄줄이 들어서 제작, 전시, 비즈니스를 망라하는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목표는 창조산업계 ‘삼성’을 만드는 것. “민간에 공간 지원해주고 기술 기반 닦아주고 외국 진출할 수 있게 돕는 게 우리 역할이예요. 창조산업 분야에서 삼성, LG 같은 기업들이 나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거지요. 글로벌 기업들이 나와서 세계시장을 제패하면 수출 길이 열리고 일자리가 만들어져요.”
올해를 ‘원년’으로 콕 집은 이유는 뭘까. 이 실장은 “서울이 영감을 주는 도시가 됐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다퉈 서울에서 큰 행사를 개최하고, 신제품 출시 장소로 서울을 원하고 있어요.” 지난해 글로벌 패션 브랜드 루이비통은 잠수교에서 패션쇼를 개최했고, 268편의 해외 작품이 서울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세계 최대 게임축제인 ‘롤드컵’도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렸다.
서울이 하룻밤 새 글로벌 스토리텔러들의 ‘뮤즈’가 된 건 아니다. 오세훈 서울시장 첫 임기 때인 2010년 서울시 관광과장이었던 이 실장은 “그 당시 오 시장님이 외래관광객 1200만 명을 선포하고 서울을 알리기 위해 별일 다하셨다”고 했다. “외국에서 사람 모이게 하려면 볼거리, 먹거리가 있어야 되잖아요. 시장님이 그때 짜장면도 팔았어요. 옛날에 시 직영 짜장면 집이 있었다니까요. 보여줄 것도 필요하니 난타 나오고 공연장 만들고 호텔 짓고 그때 인프라를 만든 거예요.”
실제로 “잘 나가는 드라마나 영화 배경으로 서울이 등장하는 것 만큼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효과적인 홍보가 없다”고 했던 오 시장은 서울을 세일즈하기 위해 ‘밥값’도 꽤 쓴 걸로 알려졌다. 이후 해외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에 서울이 ‘매력적인 도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 CNN이 주요 도시 날씨를 소개하면서 지도에 서울을 표시한 것도 이때부터다.
오 시장 첫 임기 때 만든 영화창작공간에서 한국영화 흥행작도 쏟아졌다. ‘7번 방의 선물’ ‘군도:민란의 시대’ ‘마약왕’ 등 276편의 영화가 관객을 만났다. 누적 관객 1300만 명을 돌파한 ‘서울의 봄’이 탄생한 곳도 여기다.
무엇보다 절실한 건 인력양성. 청년취업사관학교 서대문 캠퍼스에서 창조산업 특화교육을 제공하고, 스타트업 발굴 전담 시설인 ‘창업허브 창동’도 운영한다. 이 실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 대학은 혁신 생태계의 중심지인데 서울 대학생 45만 명, 외국 유학생도 7만4000명”이라며 “대학교육과 산업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유치 전략은 달라진 위상을 실감케 한다. “이제 아무나 안 받아요. 예전에는 토지 싸게 공급해주고 세금 깎아주면서 모셔왔는데 지금은 고도 전략을 세워 정말 필요한 거를 유치해오고 있어요.” 긴 세월 다져놓은 기반 덕에 서울의 ‘콧대’가 이제 꽤 높아진 셈이다. 최근 넷플릭스 자회사 ‘아이라인 스튜디오’는 5년간 1억 달러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수백 명의 국내 채용 인력을 통해 한국 산업 기술 발전에도 기여할 전망이다.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오 시장의 ‘앞선’ 철학이 뭇매를 맞을 때 그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만큼 지금의 기회가 소중하다는 걸 안다. “세계적으로 서울에 대한 평가와 시선이 10년 전과 크게 달라졌어요. K콘텐츠가 사랑받고 주목받는 시기에 경제정책의 수장이 된 만큼 제대로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경제정책실은 혁신기술을 기반으로 콘텐츠, 뷰티, 패션, 바이오의료 등 각 분야의 산업을 유기적으로 성장시키는 플랫폼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