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는 지난해 4분기 221억 달러(29조5035억 원)의 매출과 5.15달러(6875원)의 주당 순이익을 기록했다고 이날 밝혔습니다. 매출은 시장조사기관 LSEG가 집계한 시장 예상치 206억2000만 달러를 웃돌았고, 주당 순이익도 전망치 4.64달러를 뛰어넘었죠.
또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매출은 265%, 총이익은 122억9000만 달러로 무려 769% 급증했습니다.
일단 개인 투자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만약 실적이 시장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면 투심이 악화할 수도 있었는데,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하면서 우려를 덜어낸 겁니다. 랠리 기대감도 높아지고만 있는데요.
사실 전문가들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주가 상승을 점치며 매력적인 투자처라는 분석이 이어지는 반면, 현재 주가가 너무 비싸다면서 급락을 예측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죠.
앞서 엔비디아의 지난해 3분기 매출과 순이익은 시장 예상치보다 각각 12%와 19%가량 웃돌았고, 2분기 매출과 순이익도 전망치를 각각 20%와 30% 뛰어넘은 바 있습니다. 여기에 4분기의 기록적인 매출과 순이익이 더해지면서 놀라움을 자아냈는데요. 실적 발표에서 놀란 건 개미들뿐만이 아닐 듯합니다.
실적 발표 전까지 월가에서는 엔비디아의 목표주가를 연신 높여 잡아왔습니다. 이들의 예측보다 엔비디아 주가 상승세가 훨씬 가파른 탓에 목표주가를 매번 조정해야 했던 건데요. 엔비디아 주가는 지난 12개월간 230% 이상, 올해 들어서만 50%가량 올랐습니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시가총액이 큰 기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죠.
그럼에도 월가에선 엔비디아의 주가 흐름에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습니다. 지난주 팩트셋 집계에 따르면 애널리스트들은 엔비디아가 4분기 4.59달러의 조정 주당순이익(EPS)에 204억 달러(약 27조2100억 원)의 매출액을 올렸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1년 전에는 각각 0.88달러, 61억 달러를 기록한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인데요. 특히 AI와 관련한 데이터센터 매출은 1년 전 36억2000만 달러에서 172억 달러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죠.
또 CNBC에 따르면 LSEG 조사에서 애널리스트들은 매출 206억2000만 달러, 4.64달러 EPS를 예측하면서 시장 전망이 다시 한번 높아졌는데요. 실적 발표 당일 베일을 벗은 엔비디아는 이같은 전망까지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엔비디아는 AI 열풍을 이끌어온 장본인인 데다가, 지수를 끌어올린 기술주 7대 종목 ‘매그니피센트 7’(M7)에 포함된 종목이라 시장의 큰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기록적인 실적에는 전 세계를 강타한 AI 열풍이 주효했는데요. AI 반도체 부문이 속해 있는 데이터센터 사업부문 매출이 전년동기비 409% 폭증한 184억 달러로 불어난 사실이 이를 방증합니다. 엔비디아 총매출 증가율인 265%의 1.5배가 넘는 성장률인데요. 데이터센터 매출 절반 이상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알파벳 같은 대형 클라우드 업체들로부터 거뒀습니다.
이마저도 ‘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 영향이 적용된 결과입니다. 앞서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때인 2019년 화웨이를 겨냥한 5G 반도체 칩 수출 금지를 시작으로 2022년 10월 7일 미국 기술을 사용한 첨단 반도체 장비나 인공지능(AI) 칩 등의 중국 수출을 포괄적으로 제한하는 수출통제를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5월부터는 중국의 첨단반도체 산업 접근을 원천 봉쇄할 목적으로 디리스킹(위험 제거) 정책을 본격화했고, 3개월 후인 8월에는 첨단반도체·양자컴퓨팅·AI 등 3개 분야와 관련된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 등 자본 투자도 규제해 ‘돈줄’까지 틀어막았죠. 조 바이든 행정부는 추가 조치까지 만지작거리면서 중국의 첨단 반도체 산업 발전 차단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의 실적 발표 전 우려를 자아낸 요소 역시 ‘중국 리스크’였습니다. 엔비디아도 이날 실적 발표에서 지난해 10월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을 추가로 규제하면서 중국 수출용으로 개발한 AI 반도체들 수출길이 막히면서 타격을 입었다고 밝혔는데요. 중국 수출 규제로 인한 충격이 우려만큼은 크지 않았다는 게 이번 실적 발표로 확인된 셈입니다.
엔비디아는 “보수적으로 책정”한 2024 회계연도 1분기 매출 전망치를 240억 달러로 제시했습니다. 이 역시 시장 예상치(220억 달러)를 웃도는 규모인데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가속 컴퓨팅과 생성형 AI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변곡점)에 도달했다”며 “전 세계적으로 기업, 산업, 국가 전반에 걸쳐 수요가 급증하는 만큼 AI 산업으로 전환 과정은 이제 시작”이라고 밝혔습니다.
젠슨 황 CEO는 “(AI 칩 관련) 공급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폭발적 수요로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 공급 제약은 1년 내내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글로벌 데이터센터 관련 산업 규모가 5년 내 2배 넘게 커질 것”이라고도 강조했죠.
이날 뉴욕 증시 정규장에서 2.8% 하락 마감한 엔비디아는 실적 발표 후 시간 외 거래에서 10% 가까이 급등했는데요. 훈풍은 새로운 미 증시 주도주로 불리는 ‘AI5’(엔비디아·MS·TSMC·브로드컴·AMD)에도 호재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MS, TSMC, 브로드컴, AMD의 주가는 시간 외 거래에서 모두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국내 반도체 기업에도 훈풍이 불면서 코스피 지수가 상승 마감했습니다. 22일(한국시간) 코스피는 전일 대비 10.96포인트(0.41%) 오른 2664.27에 거래를 마쳤는데요. 삼성전자는 전일 대비 0.14% 오른 7만3100원에, SK하이닉스는 5.03% 오른 15만6500원에 장을 마쳤습니다. SK하이닉스는 이날도 52주 신고가를 갈아치웠습니다.
다만 실적 발표 이후 주가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우선 분위기는 상승을 점치는 쪽으로 더 기울어 있는데요. 김일혁 KB증권 연구원은 “시장에서는 운용사들이 엔비디아에 대해 제시한 실적 전망치가 높다는 우려가 있었고 수요는 강하지만 공급이 충분하지 않아서 매출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며 “경쟁사들의 도전이 본격화되고 있고 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도 엔비디아 매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시장은 염려했지만 AI 시장 성장 전망과 강한 독점력을 바탕으로 장기 주가 상승 추세는 이어질 전망”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예상치를 상회한 실적이 투자자들의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자신만 뒤처지거나 소외된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는 증상)를 부추겨 주가를 급등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과거 사례를 보더라도 지난해 2월 실적 보고에서 순익과 매출이 시장의 전망을 상회하자, 주가는 14% 올랐습니다. 지난해 5월 실적 발표 후에는 24%가량 급등했죠.
다소 회의적인 의견도 있습니다. 조던 클라인 미즈호증권 애널리스트는 실적 발표에 앞서 “(엔비디아의 실적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 도전적인 상황”이라며 실적 발표 후 “(주가가) 상승할 가능성보다 하락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보인다”고 밝힌 바 있는데요. 애스워드 다모다란 뉴욕대 교수도 “다른 M7 주식과 비교해 봐도 (엔비디아 주가는) 너무 비싸다”며 엔비디아의 어닝 잠재력과 현금 흐름을 감안했을 때 현재 주가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엔비디아뿐만 아니라 MS 주가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예전에는 좋은 매수 구간이 있었지만, 올해 주가 상승세를 보면 지금은 비싸도 너무 비싸다”고 강조했죠.
20일 블룸버그는 엔비디아에 대한 22일 만기 단기 콜·풋옵션 가격을 분석한 결과 실적 발표 이후 시총 변동 폭이 1800억 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엔비디아 관련 옵션 거래 규모가 워낙 커서 주가가 급등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엔비디아와 관련해 지난주 거래된 옵션 규모가 명목가치 기준 약 5000억 달러에 이른다고 전하기도 했죠.
일각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전 부동산 버블이나 1990년대 닷컴 버블을 거론하고 있기도 합니다. AI의 과도한 광풍을 우려한 데 따른 건데요. 실체 없이 막연한 기대에 의해 주가가 급등했던 닷컴 버블 현상과 ‘실적’에 바탕을 둔 엔비디아의 최근 랠리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반박이 나옵니다.
소시에테제네랄(SG)은 “미국 증시가 닷컴 버블 때와 같은 비합리성에 도달하려면 최소 25%는 더 올라야 한다”며 “닷컴 버블 당시 S&P500지수의 주가수익비율(PER)은 25배에 달했지만, 현재는 20배 수준이다. 닷컴버블과 최근의 미국 증시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짚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