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Reset)’.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본 상상일 것이다. 스즈코(아오이 유우 분) 역시 그랬다.
영화 ‘백만엔걸 스즈코’의 주인공 스즈코는 우연한 계기로 억울하게 전과자가 된 뒤 나고 자란 곳을 떠나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곳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택한 방법은 아르바이트하며 생활하다가 100만 엔(약 880만 원)이 모이면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 그렇게 스즈코는 바닷가 근처의 한 식당에서 산골 마을의 과수원으로, 과수원에서 한 소도시의 꽃집으로 이동하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인생을 꾸려나간다.
그러나 사는 것은 스즈코의 생각처럼 단순하고 깔끔하지 않았다. 이사와 함께 주변인들이 모두 바뀌어도 스즈코의 인생에는 언제나 사람과 함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찾아왔다. 익숙한 것을 뒤로하고 낯선 곳으로 향하는 스즈코의 여정은 도피일까 도전일까. 답은 또다시 떠나기로 한 스즈코의 당찬 발걸음에 달렸다.
스즈코와 같이 정규직 대신 아르바이트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을 ‘프리터족’이라고 부른다. 프리터족은 자유를 뜻하는 ‘Free’에 독일어로 일을 뜻하는 ‘Arbeit’를 더해 만든 신조어로 1990년대 초반 일본에서 특정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하며 생활하는 청년층의 비중이 높아지며 탄생했다. 프리터족은 돈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며 자유롭고 소소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인데 최근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한국에서도 많이 포착되고 있다.
키워드 분석으로 트렌드를 파악하는 빅데이터 전문 기업 ‘썸트렌드’ 집계에 따르면 올해 1월 13일부터 2월 12일까지 한 달간 온라인상에서 ‘프리터족’을 검색한 양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5.5% 증가했다. 통계청 조사 결과 실제로 국내 파트타임 근로자 수도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4.2%p 증가하는 등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는 ‘프리터족의 특징’이라는 제목의 게시물들이 활발하게 공유됐다. 해당 게시물들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에서의 프리터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정규직 직업보다 아르바이트를 더 선호 △특별한 약속이 아닌 이상 혼자 있는 것 선호 △특정 직업이나 명예나 부에 대한 욕심이 없음 △스스로 모은 돈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취미 △최소한의 비용만 벌고 그 이상 큰돈은 벌고 싶지 않음 △뚜렷한 미래 계획보다 현재가 중요 등
프리터족이 아닌 이들조차 위에 제시된 프리터족의 특징들에 공감을 표했다. 오래도록 상향 평준화되어 온 ‘평균’으로부터 멀어질 때가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획일적인 성공의 기준보다 각자의 성향에 맞는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구인·구직 플랫폼 인크루트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국내 성인 71%가 프리터족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평가의 근거로는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46.1%), ‘사회생활로 인한 스트레스가 줄어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22%), ‘취미생활 등에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어서’(17%) 등이 제시됐다. 심지어 향후 프리터족이 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1.5%가 있다고 답했다.
프리터족에 대한 긍정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배경에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최저임금의 상승이 프리터족을 선택해봄 직한 하나의 선택지로 인식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2024년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예를 들어볼 때, 2024년 최저임금은 2023년보다 2.5% 인상된 9860원이다.
이를 일급으로 환산하면 8시간 기준 7만8880원이고 주 근로시간 40시간 기준으로 환산하면 주당 유급 주휴수당을 포함할 때 월급은 206만740원에 해당한다. 이는 중소기업 4년제 대졸 신입사원 월평균 실수령액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금액이다.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일자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정규직 취업을 할 이유가 하나 줄어든 것이다.
또한, 얼어붙은 채용시장과 심화된 노동 양극화 역시 청년 프리터족을 확산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7일 HR테크 기업 인크루트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국내 대기업 88곳, 중견기업 134곳, 중소기업 488곳 등 총 710개 기업을 대상으로 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 올해 채용 계획을 확정한 곳은 71.3%였다. 더 세부적으로 살펴볼 때 확실하게 채용 계획이 있다고 밝힌 곳은 응답 기업의 41.4%에 해당했으며 준비 중이라고 답한 곳은 29.9%에 해당했다.
특히, 채용 계획을 확정한 대기업의 비율이 2022년부터 연이어 내림세를 타고 있다는 점과 신입 공개 채용 비중보다 수시 채용이나 경력직 채용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는 점은 사회에 발돋움하는 청년들을 암울하게 한다. 그런 가운데 채용 현실과 달리 청년들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대한 인식은 더욱 양극화되고 있다. 통계청이 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3세에서 34세 청년들의 대기업 선호도는 27.4%였던 반면, 중소기업 선호도는 3.6%에 불과했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해를 거듭할수록 확대되는 1인당 월평균 노동비용 추이와 월평균 상여금 및 성과금 차이 등으로부터 비롯됐다.
가치관 및 직업관 변화 또한 프리터족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인 생애주기에 맞춰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경험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감이 완화되고 있다. 보편적인 삶, 전통적인 생애주기보다 자신의 성향이나 가치관, 자아실현 등 자기선택적 요인들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임금이나 직업적 안정성보다 시공간적 자율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유튜브만 봐도 ‘내가 프리터족으로 사는 이유’, ‘내가 프리터족이 된 이유’,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프리터족’ 등 개인의 성향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쉽게 접해볼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이 다양화됨에 따라 이에 대한 편견 없는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동시에 비자발적으로 그러한 삶에 내몰린 이들은 없는지 사회 구조와 제도적 맹점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