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들 “2000명 제시한 적 없어”…고령화·생산성 향상·수요 변화 고려해야
“제 보고서는 약 1600페이지에 달하며, 20개의 보건의료계 직역에 대한 인력 추계가 담겨 있습니다. 정부는 그 중 매우 일부만을 인용해 의대 증원 근거로 제시했습니다.”(홍윤철 서울의대 교수)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의 근거로 제시한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자들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의사를 더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맞지만, 보고서에 담긴 복잡한 가정을 무시한 채 단기간 급격한 증원을 추진하는 정책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7일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의사 수 추계 연구자 긴급 토론회’에 참석한 △권정현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 △오주환 서울대 의대 교수 △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의대 증원 정책을 둘러싼 오해와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의 보완점을 짚었다.
앞서 정부는 ‘5년간 해마다 2000명’ 규모의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 그 근거로 △미래사회 준비를 위한 의사인력 적정성 연구(홍윤철 교수, 2020년) △2021년 장래인구추계를 반영한 인구변화의 노동·교육·의료부문 파급효과 전망(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 2023년) △보건의료인력 종합계획 및 중장기 수급 추계 연구(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0년) 등 보고서 3편을 제시했다.
이들 보고서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발표됐다. 보고서를 완성하기까지는 1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실제 연구가 이뤄진 시점은 1~5년 전이다. 올해 정부가 제시한 의대 증원 및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는 연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의미다. 각 보고서는 현재 시점에서 정부의 정책과 의료 환경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2030~2035년에 의사가 1만 명에서 최대 1만5000명가량 부족해진다고 내다봤다.
다만, 3개의 보고서 어디에서도 한 해 2000명이라는 규모는 언급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의대 정원을 점진적으로 증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해마다 2000명씩 증원하면 교육 및 수련 환경의 질을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다.
홍윤철 교수는 “내 보고서는 결론부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으며, 검토 결과 합리적으로 500명에서 1000명 규모의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있다”라며 “보고서 어디에도 2000명이라고 쓴 적은 없는데, 정부가 적절하게 인용하지 못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권정현 박사 역시 “내 보고서가 호도되는 방식으로 인용되고 있다”라며 “매해 5~7%를 증원하는 것이 의사 인력 확충을 위해 가장 적절하다고 썼으며, 수요 감소 돌입 시점이 찾아올 것이므로 어느 정도 증원하다가 다시 줄여나가는 방안을 제안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교육현장과 수련현장의 문제점을 고려해 점진적으로 증원해야 하는데, 2000명은 기존 정원의 60%에 달하는 규모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신영석 연구위원은 “5년 동안 해마다 2000명을 늘리고 다시 판단한다는 정부 의견은 매우 아쉽다”라며 “2035년까지 10년 동안 1000명씩 증원하는 방식으로 속도를 조절하는 방안을 고려하며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가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연구자들은 인구 구조와 의료 수요 변화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조했다. 인력 추계는 현재의 인구 구조와 기술 수준에 기반해 산출하기 때문에 미래 사회의 변화를 예측해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사망 직전 입원 진료가 증가한다. 하지만 1차 의료기관 이용이나 외래 진료는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정부가 내놓은 ‘급격한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증가한다’는 전망이 실제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기술 발전과 근무 형태 변화 역시 의사 인력 수급 추계에 중요한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인공지능(AI)과 로봇 등의 기술 도입으로 생산성이 향상돼, 의사들의 일손이 남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주 80시간을 초과하는 전공의 근무 시간이 정상적으로 단축되고, 향후 주 4일 근무나 단기 교대 근무 등이 도입되면 의사 고용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오주환 교수는 “고령 인구가 늘어나면 의료서비스 수요도 무조건 증가한다는 추측은 잘못된 생각이다”라며 “지금 80대와 20년 전 60대 사진이 비슷하고, 60대부터 80대의 의료 이용량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건강한 노령화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 의사들도 과거보다 늦게 은퇴하고 오래 일한다”라며 “이런 사회적 변화를 무시하면 의사 인력 과다 추계로 이어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