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인권보호 지침에 갈등 노출
“유럽연합(EU)의 정책 결정에서 더 이상 독일을 신뢰할 수 없다.”
EU 기구가 몰려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최근 들어 종종 이런 탄식이 흘러나온다. 독일이 막판에 합의를 번복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EU의 정책 결정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9일 벨기에서 EU 27개국 대사들은 기업들이 공급망을 운영할 때 환경과 인권을 존중하라는 지침을 채택할 예정이었다.
지난해 말 잠정 합의된 것이어서 관례대로라면 무난히 통과가 예상됐었으나 독일이 갑자기 입장을 번복해 지침이 승인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내용이 크게 희석된 지침이 지난 15일 통과됐다.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녹색당, 가장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자민당)으로 이뤄진 3당 연립정부(연정)의 정책 불협화음 때문이었다. 연정 내 독일의 갈등이 EU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치열한 패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군사력과 경제력이 G2에 뒤처지는 유럽연합은 규범적 권력임을 내세워왔다. 2005년부터 세계 최초로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소를 운영한 것을 비롯해 지난해 10월부터 탄소국경세를 시범 도입,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로벌 이슈와 관련된 규범을 만들어 확산하며, 앞서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독일의 반대로 합의가 늦춰진 법의 정식 명칭은 ‘기업의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 CSDDD)이다. 수많은 협력업체를 거느린 기업의 경우 환경보호와 인권을 무시하는 협력업체와 거래하면 벌금을 물거나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
EU 기업들의 경우 근로자 500명 이상이고 전 세계 연매출액이 1억 5000만 유로, 약 2100억 원 이상이면 적용된다. EU 기업이 아니더라도 EU 내 연매출액이 1억 5000만 유로 이상이면 역시 이를 준수해야 한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국내 대기업도 여기에 들면 응당 지켜야 한다. EU의 법이 비단 회원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 지침에서도 드러난다. 벌금은 순매출액의 최대 5%까지다. 해당 기업들은 수많은 협력업체와 대화를 해 이를 알리고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기업에서 볼 때 매우 부담이 큰 규제다. 지침은 EU 회원국들이 법의 제정 목표에 합의 후 보통 1~2년 안에 자국에서 실행 법령을 만드는 EU 법의 하나다.
이 지침을 제정하자고 가장 앞장선 것이 독일이었기에 막판 합의 번복이 더 문제가 컸다.
독일은 지난해 1월에 공급망실사법을 제정했다. EU의 지침과 매우 유사하다. 이 법의 실행 후 독일 기업들의 볼멘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2022년 2월 말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후 독일은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더 이상 공급받지 못한다. 기업들은 높은 원가부담으로 경쟁력이 하락해 허덕거리는데 이런 규제까지 추가됐다.
독일 민간단체들은 이 법 시행 후 화학회사 BASF, 폭스바겐사가 중국 신장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이 법을 위반했다며 소송하겠다고 별렀다. 폭스바겐, BMW, 메르세데스-벤츠가 위구르 강제노동에서 생산된 부품을 썼다는 의혹을 시민단체가 작년 6월에 제기한 후 관련 보도가 잇따랐다. BASF의 경우 지난 2월 초 중국과 합작한 신장소재 자회사에서 중국 직원이 위구르인들 인권을 침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곧바로 자회사 지분을 매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정부는 EU 차원의 이런 법이 있어야 회원국 기업들 간 공정한 경쟁이 되기에 이 지침을 만드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막판에 자민당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자민당은 2021년 가을 총선에서 10.7%를 얻었다. 그러나 1년 전부터 이 정당은 지지율 5% 턱걸이에 걸려있다. 독일의 연방하원에 진출하려면 최소한 5% 지지를 얻어야 한다.
생존 위기에 몰린 자민당은 기업이 반대하는 EU 지침을 강력하게 거부해야 표 얻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해, 지침 제정을 반대했다. 독일은 ‘총리 민주주의’라지만 3당 연정이어서 연정에 참여한 소수정당이 끝까지 거부하면 총리도 이를 강제할 수 없다.
독일의 이런 번복은 그러나 무의미하게 됐다. 지난 15일 EU 회원국 대사들의 표결에서 독일은 기권했으나 이탈리아 등 다른 회원국들이 찬성하면서 이 지침이 통과됐다. 반면에 적용 기업이 근로자 1000명 이상, 전세계 매출액 4억 5000만 유로로 크게 상향조정돼 규제가 꽤 완화됐다.
그런데 독일이 막판에 기존 합의를 번복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작년 3월 말 EU 회원국들은 2035년부터 휘발유, 경유 등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내연기관차의 판매를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이 역시 전에 잠정합의됐는데 막판에 독일이 한 달 이상 끌며 새로운 요구를 내걸었다.
합성연료(E-Fuel) 등을 사용하는 내연기관차를 예외로 인정해 달라고 계속 버텨 결국 얻어냈다. E-Fuel은 연소 때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만 만들 때에는 이산화탄소를 활용하고 완전 연소 비율이 높아 기존 경유차 대비 미세먼지와 온실가스 배출량이 20~40% 수준이다. 이때문에 바이오연료, 암모니아, 수소 등과 함께 탄소중립연료로 분류된다.
자동차 강국인 독일의 경우 전기차 전환에 늦었고, 합성연료를 대량생산하는 공장을 건설 중이지만 프랑스 등 다른 회원국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역시 연정을 구성하는 정당 중 가장 친기업적인 자민당이 교통부를 맡고 있어 이런 무리한 요구를 제시해 관철시켰다.
가장 친환경적이고 기후위기 대응에 적극 나선 녹색당은 이런 합의 번복을 비판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CSDDD의 거부 후 아넬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녹색당)은 “우리가 처음에 지지했던 법안을 막판에 거부했기에, 파트너로서 우리는 신뢰를 잃었고 유럽에서의 우리 영향력이 훼손됐다”고 말했다.
독일의 이런 입장번복으로 규범적 권력으로서 EU의 신뢰는 계속 추락한다.
반면에 프랑스는 어부지리를 얻었다. 프랑스는 기업의 지속가능성 실사지침 결정 과정에서 독일이 막판에 입장을 번복하자 이를 수용하는 대가로 금융기관을 일단 제외하자는 양보를 얻어냈다. BNP 파리바 등 대형 투자은행을 보유한 프랑스에 유리하다. 독일의 잇따른 막판 번복으로 핵심 내용이 크게 희석되고 정책 결정이 휘둘리는 EU를 보면서 규범적 권력은 공허하게 들린다.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