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번역본은 '날개 환상통'이 유일
수상의 영예 뒤에는 최돈미 번역가…"번역의 질이 수상 좌우해"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물고, 젠더와 상징질서의 구획을 돌파"
김혜순 작가의 '날개 환상통(Phantom Pain wings)'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시 부문에서 최종 수상했다. 한국문학이 이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은 미국의 도서비평가 전문협회인 전미도서비평가협회(NBCC)가 매년 수여하는 문학상이다. 1975년부터 매년 그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영어로 쓰인 최고의 책을 선정해 시·소설·논픽션·전기·번역서 등 부문별로 상을 준다.
22일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날개 환상통'은 경쟁작인 '모든 영혼들'(새스키아 해밀턴), '무뢰한들의 모임'(로미오 오리오건), '안내 데스크'(로빈 시프), '미세 증거'(샤리프 새너헌) 등 4개 시집을 제치고 영예를 안았다.
최종 후보작 중 번역본은 '날개 환상통'이 유일하다. 최종후보작을 쓴 시인 5명 중 로미오 오리오건(나이지리아)과 김 작가만 외국인이고 나머지 3명은 모두 미국 시인이다.
이 시집은 번역원의 '해외출판사 번역출판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다. 등단 40주년을 맞은 김 작가의 열세 번째 시집으로 201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
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
새의 뺨을 만지며
새하는 날의 기록
공기는 상처로 가득하고
나를 덮은 상처 속에서
광대뼈는 뾰족하지만
당신이 세게 잡으면 뼈가 똑 부러지는
그런 작은 새가 태어나는 순서
- '새의 시집' 中
시집에는 총 72편의 시들이 수록돼 있다. 저자는 시집을 내면서 "이번엔 시가 나를 '새하게' 했다. 그런 다음 나를 날지 못하게 하고, 날개를 꺾었다"라며 "그러므로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이 시집에 대해 "김혜순의 시에서 작별은 리듬으로서의 작별이며, 리듬은 작별하는 리듬"이라며 "리듬이 만드는 사건은 시간에 대한 구획을 넘어서는 무한의 영역에 진입한다. 리듬은 비유보다 원초적이고 급진적으로 '시적인 것'"이라고 평했다.
이어 "리듬의 세계에서 시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파동의 사건이다. 감각과 몸의 영역에 작용하는 리듬은 해석도 인식도 필요하지 않다"라며 "김혜순의 리듬은 주체와 객체, 젠더와 상징질서의 구획을 돌파하는 언어의 파동을 통해 '현전'의 미학에 이르는 시적 에너지"라고 평했다.
한편 김 작가의 이 같은 수상의 영예 뒤에는 최돈미 번역가가 있었다. 해외에서 수여하는 대부분의 유력 문학상은 번역가와 작가에게 공동시상할 만큼 번역도서에서 번역의 질은 수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날개 환상통'을 번역한 최 번역가는 그간 '죽음의 자서전', '슬픔치약 거울크림', '불쌍한 사랑 기계' 등 김 작가의 많은 작품을 영어로 번역ㆍ출간해왔다.
최 번역가는 국제상 수상을 통해 해외에서 여러 차례 인정받았다. 미국 루시앤스트릭 번역상(2012, 2019), 그리핀 시문학상 국제부문(2019), 알도 앤 잔느 스칼리오네 번역문학상(2021)을 받았다. 또 최 번역가는 시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2020년에는 시집 'DMZ Colony'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바 있다.
곽효환 번역원장은 "예전에는 시 번역의 어려움으로 우리 문학작품이 국제상을 받는 것은 먼일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최돈미 번역가처럼 양질의 번역을 할 수 있는 번역가들이 늘어나면서 국제상 입후보·수상 소식이 늘어난 것은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양질의 번역가가 늘어남에 따라 세계적으로 한국문학이 인정받게 되고, 한국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선순환 구조를 꾸준히 만들기 위해 수준 높은 번역가 양성에 지속적인 노력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시집은 미국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말 선정한 '올해 최고의 시집 5권'에 포함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