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득이하게 들러리 입찰 참여…백신업계에 끼친 영향 없어”
비슷한 혐의 한국백신 사건 무죄 확정…같은 재판부가 심리
정부가 발주한 자궁경부암 등 백신 입찰과정에서 담합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제약사들이 항소심에서도 “부당 행위는 없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비슷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한국백신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만큼, 이번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이창형 부장판사)는 전날 공정거래법 위반·입찰방해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6개 제약사와 임직원들에 대한 첫 공판기일을 열었다.
이들은 정부의 국가예방 접종사업(NIP)인 자궁경부암 백신 등 입찰에 참여하며 이른바 ‘들러리 업체’를 세워 담합을 통해 폭리를 취한 혐의로 2020년 9월 기소됐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지난해 2월 1일 “피고인들의 행위로 입찰 참가자 간 자유 경쟁을 통해 낮은 가격이 형성될 가능성이 차단됐다”며 “들러리 업체를 세워서 입찰에 참여하는 행위가 위법함을 알면서도 관행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녹십자와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에 각 7000만 원, 보령바이오파마와 유한양행에 각 5000만 원, SK디스커버리와 광동제약에 각 3000만 원을 선고했다. 이들 업체 임원 7명도 300만∼5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날 항소심에서 제약사 측 변호인들은 프리젠테이션(PT)과 구술 변론을 통해 항소 이유를 설명했다. 각각 선임한 로펌은 달랐지만, 이들 변호인 모두 “당초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구도의 입찰이었기 때문에 부당 행위가 없었을 뿐 아니라 고의성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 변호인은 “들러리라는 외관만 보면 자칫 부당공동행위로 보일 여지가 있지만, 이 사건의 핵심은 전세계 단 하나밖에 없는 기성제품에 대한 독점판매 계약이라는 점”이라며 “수의계약 사항이지만, 시간이 걸리니 유찰 방지를 위해 들러리를 참여시킨 것”이라고 했다.
이어 “백신 공급 일정이 지연되면 질병관리본부는 국가정책상 문제 원인 야기로 질책받고, 백신 공급사에 압박으로 돌아온다”며 “부득이 들러리 입찰을 참여했지만 사업자 이익, 수요자 피해, 가격 상승 등이 없었고 백신업계에 미치는 영향도 전무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변호인은 “독점 판매권을 보유하고 있는 사실 등을 모두 알고 있었고, 미리 협의된 가격의 범위 내에서 그 금액으로 투찰했기 때문에 높은 가격을 받을 것이란 인식도 없었다”며 “고의라는 구성 요건도 인정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큰 틀에서 동일한 구조인 한국백신 사건 판결을 고려해달라고 요구했다. 한국백신 법인과 임원은 2016∼2018년 결핵 예방에 쓰이는 고가의 도장형 백신을 납품하기 위해 주사형 BCG 백신 공급 물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한 혐의를 받았다.
또 주사형 공급 차단 사실을 숨기고 질병관리본부 공무원이 도장형 BCG 백신을 임시 국가예방 접종사업 대상으로 지정하게 한 뒤, 도매상을 들러리로 내세워 백신을 낙찰받아 국가예산 92억 원을 가로챈 혐의도 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시장지배적 지위가 있더라도 백신 출고를 부당하게 조절했다고 볼 수 없다. 도매상을 들러리로 세운 건 입찰공정을 해하는 행위이지만 고의가 있었음이 합리적으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2월 15일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확정했다.
공교롭게도 한국백신 사건 2심을 담당했던 재판부가 현재 진행 중인 6개 제약사의 항소심을 맡고 있다. 재판부는 다음 달 21일 6개 제약사에 대한 결심 공판을 진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