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딸 아이가 좋아하는 동요를 함께 듣다가 꿈(미래 직업)에 대한 노래를 접했다. 각자 되고 싶은 꿈을 꾸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면 ‘최고의 비행사’, ‘최고의 음악가’, ‘최고의 과학자’,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찬 내용.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들었는데, 문득 가사가 귀에 와서 꽂혔다. 꼭, 꼭, 꼭, ‘최고’가 되어야 할까? ‘그냥’ 비행사가 되면 안 될까?
십 년 전, 나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에서 누워 지냈다. 몸은 건강했지만 마음에 병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집 안에 갇힌 백수로 살았는데, 그렇게 수년 동안 겨우 숨만 쉬며 살다 보니 ‘이러다가 죽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을 싹 정리하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저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850km를 28일 동안 걸었다. 그리고 순례길에서 정말로 별별 사람을 다 만났다. 유부남과 금지된 연애를 이어가다가 이별을 선언하고 마음을 돌보려고 왔다는 영국 여성부터, 돈은 상당히 많이 벌었지만 자신이 사라지는 듯해서 잘나가는 로펌에 그냥 사표를 내고 왔다는 독일 변호사까지.
어느 날엔 뙤약볕 아래에서 길을 걷다가, 집에서 편하게 입는 반바지를 걸치고 초라한 슬리퍼를 끌며 터벅터벅 걷는 독일 십대 여학생과 만났다. 본인은 청소년으로서 정당 활동을 열심히 하는데, 좀 더 넓게 세상과 만나고 싶어서 순례길에 왔다고 말했다. 대화 중에 꿈을 물어보니 그냥 ‘좀 더 자신답게 살고 싶다’고 답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면 한국 사람을 많이 만난다. 통계를 찾아 보니 한국인이 스페인 사람 다음으로 순례길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에겐 뚜렷한 특징이 있으니, ‘목숨을 걸고’ 순례길을 걷는다. 세계 사람들 모두 잠시 시간을 늦추거나 멈추고 여유를 찾으러 오는 길에서 한국인만 전투하듯 걷는다.
자기돌봄(self-care) 전문가들은 ‘감사하면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감사는 ‘내가 이미 가진 것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이제 생후 30개월을 넘긴 내 딸이 나중에 본인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야 좋겠지만, 최고가 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그냥 비행사’가 되더라도 웃으며 살면 좋겠다.
이재원 강점관점실천연구소장·임상사회사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