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로봇 청소기가 화두에 올랐다. 가벼운 턱을 못 넘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청소가 제대로 안 돼 따로 걸레질을 해야 했던 멍청한 로봇 청소기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가 오갔다. 로봇 청소기를 주문했더니, 아내의 잔소리가 확 줄었다는 기적의 체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로봇 청소기는 건조기와 식기세척기에 이어 이른바 ‘3대 이모님(집안일을 돕는 가전을 부르는 별칭)’으로 불리며 빠르게 시장을 키우고 있다. 150만 원을 훌쩍 넘는 고가이지만, 홈쇼핑 등에서 판매할 때마다 완판 행진이다.
놀라운 건 국내 로봇청소기를 장악한 제품들이 중국산이라는 점이다. 국내 로봇청소기 시장 규모는 지난해 기준 4272억 원으로 추산되는 데, 이중 절반은 중국 로보락이 차지하고 있다. 로보락 외에도 에코백스, 드리미 등 중국 ‘빅3’ 기업이 일제히 한국 시장에서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입지가 견고한 국내 가전 시장에서 이례적으로 중국에 주도권을 뺏긴 이유는 뭘까.
국내 기업들의 시장 진출이 늦었던 건 아니다. LG전자가 2003년, 삼성전자는 2006년 각각 로봇청소기를 출시했다. 그러나 국내 가전업계는 대형 가전에 더 집중했고, 로봇청소기는 진공청소기를 보조하는 ‘조연’이라는 인식 탓에 연구개발이 더뎠다.
중국 기업들의 거침없는 경영 행보도 한몫했다는 평가다. 국내 가전 업계가 먼지 흡입과 물걸레질을 한 번에 처리하는 일체형 로봇청소기의 기술 보완을 고심하는 동안 중국 기업들은 발 빠르게 제품을 출시했다. 로봇청소기가 물걸레를 빨고 건조까지 알아서 하도록 한 중국 제품에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중국 로봇 청소기의 국내 시장 점령기를 보다 보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위기의 진원지로 꼽히는 고대역폭 메모리(HBM)가 떠오른다.
메모리 반도체 부동의 1위를 지켜 온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시대의 주역으로 자리 잡은 HBM에서 SK하이닉스에 선두를 내줬다. 결국 삼성전자는 이례적인 원포인트 인사로 반도체 부문 최고경영자(CEO)를 전영현 부회장으로 전격 교체 하는 등 충격은 현재 진행형이다.
삼성전자가 HBM 시장에서 뒤처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시장을 간과하고 내버려 뒀다는 점이다. 당시 경영진의 판단 미스, 신속한 의사결정 부재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로봇 청소기 선두를 중국에 내준 이유와 닮았다.
10년 전부터 세상에 등장했던 HBM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2~3년 정도밖에 안 됐다. 삼성전자도 2010년대 중반 이후 제품 연구개발과 양산에 돌입했다. 그러다 2019년부터 삼성전자는 관련 HBM 연구개발에 힘을 뺐다.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 HBM에 대한 연구개발 및 투자보다는 메모리반도체 업황 악화에 대응하고자 내실을 다지는 데 무게를 뒀다. 반면 SK하이닉스는 HBM에 대한 연구개발과 투자를 꾸준히 이어갔다. 이같은 실기가 지금 두 회사 HBM 사업의 격차를 가져왔다.
“삼성의 강점을 살려 삼성답게 미래를 개척하자.” 1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미국 동부와 서부를 가로지르는 약 2주간에 걸친 미국 출장 일정을 마무리하며 던진 일성이다.
과거 삼성전자는 당장의 수익보다 긴 호흡을 보며 미래를 준비했다. 앞으로 떠오를 먹거리를 읽는 눈도 탁월했다. 퍼스트무버로 쌓아 올린 세계 1등 상품도 수십 개다. 경영진부터 젊은 MZ세대 직원까지 모두 ‘삼성답게’ 다시 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