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뒤집고 책임 인정…법원 “일본기업 아직도 배상 안해”
향후 강제동원 손배소에도 큰 영향…“사법부 의지의 문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항소심 법원이 1심 판단을 뒤집고 잇따라 일본기업의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인데, 이번 소송의 재판부는 현재까지도 피해보상 조치를 하지 않는 일본과 일본기업을 질타했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6-2부(지상목·박평균·고충정 부장판사)는 전날 강제동원 피해자 고 정모 씨 자녀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에게 1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일본제철의 불법행위로 인해 망인이 심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며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한 점, 노동 시간, 고문 및 후유증 등 원고들의 진술에 비춰보면 강제노동을 강요당한 사실은 넉넉히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은 대법원의 2018년 10월 30일 판결에 따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할 것인바, 원고들의 청구권 및 소권이 소멸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불법행위를 자행한 일본이나 이에 편승한 일본기업은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권리행사를 독려하거나 보상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사정이 이러하다면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경우 권리행사의 상당한 기간은 시효정지에 준하는 기간보다 연장해 인정함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정 씨는 생전에 1940∼1942년 일본 이와테현 가마이시제철소에 강제 동원됐다. 유족은 정 씨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며 2019년 4월 15일 2억여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앞서 1심은 정 씨 유족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만료됐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손해배상 청구권은 가해자가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 혹은 피해자가 손해사실과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이 지나면 소멸한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소멸시효 계산 기준을 ‘2018년 10월 30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판결 선고부터 3년이 지나기 전에 소를 제기한 만큼, 청구권이 인정된다며 1심 판단이 뒤집힌 것이다.
같은 날 중앙지법 민사항소7-1부(김연화·해덕진·김형작 부장판사)도 민모 씨 유족 등 5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 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피고가 8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대법원이 2018년 일본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법적 견해를 최종적으로 명확하게 밝혔다”며 “이 선고로 비로소 대한민국 내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사법적 구제가능성이 확실하게 됐다”고 했다.
정 씨 유가족을 대리한 전범진 변호사(새솔 법률사무소)는 “강제동원 판결은 사법부 의지의 문제”라며 “2018년 이후 3년이 넘은 건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 기업들도 하루빨리 배상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