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억 남는 고객? 부친이 묵었던 호텔 607호 룸 키 돌려주러 온 외국인"
"조선호텔 최고의 자산은 역사…서비스는 시간과 사람이 만드는 것"
"호텔업 앞으로도 성장할 것…국내 호텔ㆍ관광 발전 위해 '질과 양 '균형 필요"
5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서울에서 만난 이정욱 조선호텔앤리조트 총지배인은 남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2000년 조선호텔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총지배인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로, 올해 개관 110년을 맞은 조선호텔 접객서비스 총책임자다. 한여름에도 긴 팔 셔츠와 슈트를 늘 입다 보니 이제는 정장 차림이 일상이 됐다는 그다. 첫인상 역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꼼꼼한 프로 호텔리어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의 꿈은 사실 호텔리어가 아니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언론인을 희망했으나, IMF(외환위기) 등 시대적 상황에 떠밀려 계획에 없던 호텔에 입사했다. 그는 "(언론인을 꿈꿨기에) 대학 땐 성격이나 세상을 보는 시각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면서 "그러다 조선호텔 마케팅부문에 지원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호텔리어의 삶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취감과 보람을 통해 '천직'이 됐다. 20년 넘게 일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2년 전 한 외국인 고객과의 만남이었다 이 총지배인은 "보통 총지배인을 만나려는 고객은 컴플레인(불만 사항) 등 부정적인 상황이 대부분이라 한껏 긴장하고 갔는데 그분이 숫자 607이 적힌 금속 열쇠가 담긴 상자를 줬다"고 말했다.
상자를 열고 열쇠를 보자마자, 이 총지배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요즘 호텔에선 첨단카드키를 사용하지만, 그 외국인이 건넨 것은 1960~70년대 조선호텔에서 쓰던 607호의 룸 키(Room Key)였다. 이 총지배인도 호텔 100주년을 맞았던 2014년 유구한 조선호텔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과거 사용한 룸 키를 경매 사이트에서 사들였기에 익숙한 그것이었다.
이 총지배인은 "부친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 외국인 고객이 조선호텔 룸 키를 우연히 발견했고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한국을 찾아 열쇠를 돌려주려고 일부러 저희 호텔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분은 어린 시절 부친과 함께 조선호텔에 머문 기억도 선명하게 회상했다. 그 키를 받았을 때 말로 할 수 없는 전율이 느껴졌다"고 강조했다.
최신식 5성급 호텔이 속속 생겨나지만, 조선호텔이 국내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배경이 바로 이런 유구한 역사와 헤리티지(유산)임을 그는 거듭 힘주어 말했다.
이 총지배인은 "우리가 가진 자신감은 유형의 것이 아니다"라며 "이곳에서 100년 넘게 호텔업을 하고 있고, 그동안 고객께 항상 첫 번째 시도를 해왔다"며 "더 새롭고 만족스러운 서비스, 최상의 혜택을 제공할지 항상 고민하는 조선호텔 직원들의 숭고한 정신이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게 최고의 경쟁력이며, 이를 잘 아는 고객들도 대(代)를 이어 조선호텔을 찾는 이유"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호텔업은 단순히 새롭고 멋진 시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시간과 사람이 만든 서비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더 자연스럽게 빛나게 되는 것"이라며 무형적 헤리티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설 면으로만 따지면 조선호텔보다 크고 최신식 호텔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지만, 1914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켜켜이 쌓인 시간 동안 누적된 호텔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과 접객 노하우, 고객들의 추억을 따라잡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현재 웨스틴조선서울에는 공식 은퇴를 했지만, 이후 경영진이 '삼고초려' 해 업무에 복귀한 70대 도어맨이 근무 중이다. 이 총지배인은 "제가 입사할 때부터 계시던 선배님이고 오랜 고객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로 통한다"면서 "이 분은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이 적극적이고 고객을 향한 시선이 똑같다. 고객들은 이런 서비스를 통해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헤리티지를 중시하는 이 총지배인에게 워라밸에 민감한 MZ세대 직원들에 대한 생각을 묻자, "(관점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MZ세대 직원들은 굉장히 열정적이고 다양한 사고를 한다. 또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그 친구들한테 '실수해도 괜찮으니 한번 해보라'고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 호텔업의 미래는 어떨까. 이 총지배인은 "2차전지(배터리)만큼이나 밝다"며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생존 위주 경제 활동에 주력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 세대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호텔ㆍ레저시장 규모가 매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 호텔 기업의 경쟁력이 자타공인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큼 올라섰다. 그는 "제가 입사했을 당시엔 국내 주요 호텔 총지배인 대부분이 외국인이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며 "여성 총지배인도 늘어나는 등 호텔ㆍ관광업이 성숙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있다. 이 총지배인의 최대 고민은 "대한민국 최고 호텔의 지위를 어떻게 계속 유지할 것인지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이는 결국 고객에게 어떻게 인정받느냐의 문제이며, 직원들을 어떻게 잘 성장시킬지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또 "한정적인 호텔 공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해 고객께 만족을 드릴 수 있을지도 항상 고민한다"면서 천상 호텔리어임을 내비쳤다.
이 총지배인은 최근 모처럼 활기를 되찾은 국내 호텔ㆍ관광산업이 단단하게 뿌리내리기 위해선 내수뿐 아니라 해외 관광객 유치가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양보다 질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그는 "훌륭한 한국 문화의 경쟁력을 어떻게 유지할지가 관건인데, K팝과 K푸드 등 현재 여건이 아주 좋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관광객 유치라는) 양에만 치중하다 보면 결국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기에 정부와 호텔업계가 함께 한국 관광업의 질과 양의 균형을 잘 맞춰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