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빠른 정비사업 추진을 위해 도입한 신속통합기획(신통기획) 후보지 거르기에 나섰다. 주민 갈등이 심한 후보지를 제외하고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사업이 상당 부분 진행된 일부 조합은 이 같은 서울시 지침에 심리적 압박을 느낀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4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서울시는 최근 재개발 후보지 심의위원회를 통해 강북구 수유동 170-1번지 일대와 서대문구 남가좌동 337-8번지 일대의 신통기획 재개발 후보지 선정을 취소했다.
수유동 170-1일대는 2021년 12월 후보지로 선정됐지만 사업성이 낮다는 이유로 주민 반대가 30%에 달했다. 남가좌동 337-8번지 일대 또한 신통기획 입안 동의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반대 의견을 표한 주민이 약 3분의 1에 달했다. 서대문구청은 전체 구역계 중 반대 여론이 거센 일부 지역만 후보지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고려했지만 결국 사업은 수포가 됐다.
서울시는 2021년 신통기획을 도입한 이후 3년 만인 올해 사업 진행 여부가 불투명한 지역을 정리하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올 2월 ‘도시·주거환경정비 기본계획’을 개정, 정비계획 수립 단계에서 토지 등 소유자 25% 이상 또는 토지 면적의 2분의 1 이상이 반대하는 경우 입안을 취소한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이번 후보지 선정 취소는 해당 규정 신설 이후 첫 사례다.
이달 1일에는 ‘단계별 처리기한제’를 도입할 예정임을 알렸다. 앞으로 재건축 사업지는 신속통합기획 완료 후 2개월 내로 도시계획위원회에 심의 상정을 요청해야 하며, 도시계획위원회 심의 완료 후 3개월 내로는 정비계획 결정 고시를 요청해야 한다.
한병용 서울시 주택도시실장은 “신통기획 도입으로 대상지 선정부터 정비구역 고시까지 당초 5년 정도 걸리던 정비구역 지정 기간을 2년 7개월로 단축했으나 목표치인 2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며 “단계별 처리기한제를 활용하면 구역 지정에서의 지연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가 지목한 첫 타자는 여의도 시범이다. 시는 이 단지 신통기획안을 확정하며 용적률 최대 400%, 최고 층수 65층의 인센티브를 주는 대신 데이케어센터 설치를 요구했다. 소유주들은 즉각 반대에 나섰고, 결정고시가 계속 미뤄지며 사업이 지연됐다.
7월 사업시행자인 한국자산신탁이 데이케어센터를 문화시설로 변경하는 내용의 정비계획 변경 관련 조치계획서를 제출했지만, 시는 데이케어센터가 포함돼야 한다며 이를 반려했다.
시는 올해 12월 30일까지 수정 가결 의견을 보완해 정비계획 결정 고시를 요청하지 않으면 사업이 취소될 예정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이에 한국자산신탁 측은 데이케어센터를 반영한 조치계획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통기획 정비계획 결정을 앞둔 압구정 2∼5구역과 대치 미도아파트 등지에도 차례로 처리기한제를 적용할 방침이다.
업계에선 이 같은 서울시의 단호한 결정을 두고 상반된 의견이 나온다. 신통기획 자체가 공공성을 바탕으로 진행하는 사업인 만큼 갈등이 심한 소수의 사업지를 제외하고 전반적인 속도를 높이는 것이 불가피하단 입장이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신통기획 자체가 일반 정비사업보다 훨씬 많은 행정력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주민 반대가 심한 지역까지 안고 갈 여력이 없다”며 “정책 수용성이 높은 후보지를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해야 주택공급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가 신통기획 취소 시의 불이익을 이용해 정비사업 조합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 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신통기획 취소 시 일반 재건축 사업단지로 전환돼 정비구역 지정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므로 사업 기간이 대폭 지연될 수 있다. 공사비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사업이 미뤄지는 경우 조합원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은 우후죽순 뛴다.
한 신통기획 후보지 조합원은 “신통기획 신청 당시에는 조합과 최대한 잘 협의해줄 것처럼 하곤 기부채납 등 서울시가 원하는 조건을 안 들어주면 후보지 지정 취소를 하겠다니 막막하다”며 “조합원으로선 거부할 방책이 없지 않냐”고 토로했다.
김예림 법무법인 심목 대표변호사는 “정비사업이 상당 부분 진행된 조합의 경우 신통기획을 통한 사업 기간 단축은 별 효과가 없기에 민간 재개발·재건축을 선택하는 게 자율성 측면에서 유리할 수 있다”며 “현재로써는 신통기획의 공공기여를 둘러싼 명확한 잣대가 없어 서울시 의지에 따라 계속 바뀔 수 있는 상황이므로 이를 조율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이 들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