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날이었습니다. 알제리를 잡고 16강 희망을 이어가려던 한국 축구가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공격수는 무기력했고, 수비수는 집중력을 잃었습니다. 2-4 참패. 생각지도 못한 패배에 온 국민은 분노했습니다. “아~ 한국 축구는 정말 안 되는 건가…” 다시 한 번 절망감이 몰려왔습니다.
23일 오전(한국시간) 한국과 알제리의 브라질월드컵 H조 조별예선 2차전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일 듯합니다. 그러나 2-4 참패보다 더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린 손흥민의 만회골입니다.
사실 이날은 한국 축구사에 경사스러운 날이었습니다. 0-3으로 뒤진 후반 5분에 터진 손흥민의 만회골은 한국의 월드컵 통산 30호 골이었죠. 월드컵 통산 30호 골이 만들어지기까지 무려 6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월드컵 처녀 출전이던 1954년 스위스월드컵부터 2014년 브라질월드컵까지 꼭 60년입니다.
참으로 고단한 행보였습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4년 스위스월드컵 출전은 한국 축구가 세계로의 도전을 알린 신호탄이었죠. 비행기와 배를 수차례 갈아타며 일주일 만에 도착했지만, 헝가리에 0-9, 터키에 0-7이라는 혹독한 결과를 맛봤습니다. 그래도 위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도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축구도, 손흥민의 30호 골도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월드컵 첫 골이요? 32년이 걸렸습니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A조 조별예선 1차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0-3으로 뒤진 후반 27분 박창선의 중거리 슛이 아르헨티나의 골망을 흔드는 순간 한국 축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죠. 한국은 이후 김종부, 최순호, 허정무(이상 1986 멕시코), 황보관(1990 이탈리아), 홍명보, 서정원, 황선홍(이상 1994 미국)이 월드컵 골 퍼레이드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23일 역사적인 30호 골이 나왔습니다.
지금의 한국 축구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희생,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이 만들어낸 결실입니다. 월드컵에서 터진 한 골 한 골은 5000만의 간절함이 촉촉이 배어 있습니다. 한국 축구, 참으로 대견합니다.
이래도 분노만 하시렵니까. 게다가 30호 골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우리의 기대주 손흥민입니다. 손흥민은 이번 월드컵에 첫 출전해 두 번째 경기 만에 첫 골을 터트렸습니다. 이보다 희망적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손흥민은 골 세레머니도, 환한 웃음도 지어보이지 못했습니다. 죄책감 때문이죠. 경기 후엔 눈물로 분한 마음을 씻어냈습니다. 누가 손흥민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까.
승리지상주의의 일그러진 단면 아닐까요. 오로지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경기에 진 선수들은 모두 역적이요, 죄인이 됐습니다.
우리는 승리지상주의 속에서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알제리 전 패배에 대한 분노가 60년 간 피눈물로 쌓아올린 30호 골의 위대한 족적을 집어삼켜버린 것이죠.
첫 골을 넣기까지 32년을 기다렸습니다. 첫 승 위해 48년을 기다렸고요. 원정 첫 16강 진출은 56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게 있습니까. 지금 한국 축구에 필요한 건 더 많은 관심과 노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