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를 역사의 원흉으로 모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한두 사람이 망하게 하고자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다. 또 선과 악을 그렇게 분명히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신 역사책을 권한다. 기술과 문화 등 시대적 여건이나 정치경제적 구조가 먼저 설명되고, 그 속에서 여러 사람이 평면으로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런 생각 때문일까? 국정화 논쟁 속에서 새삼 신문을 읽기 싫어졌다. 명색이 역사 논쟁이고 교과서 논쟁 아니냐. 당연히 그만 한 격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즉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박이 오가야 하고, 이를 우리 현실 속에서 어떻게 녹여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이 오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뭐냐? 진영논리가 횡행하는 가운데 특정인의 인격을 훼손하는 가당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보수언론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를 ‘반쯤 죽이고’ 있다.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가 한 ‘좌편향’ 발언 하나하나를 소개하는가 하면, 그의 가계도까지 그려 가며 그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얼마나 이단적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진보언론은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등을 국정화 논의를 이끈 ‘공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과거 행적과 지금의 ‘잘못된’ 언행들을 신문의 몇 면을 할애하며 거의 ‘처단’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원로 역사학자 이존희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등을 ‘변절자’로 낙인찍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방어에도 열심이다. 진보 쪽은 한홍구 교수를 엄호하느라 열심이고, 보수 쪽은 국정화를 지지하는 인사들을 엄호하느라 열심이다. 논조도 똑같다. 왜 그들의 발언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를 가지고 트집을 잡느냐 따진다. 발언이나 행동 일부를 두고 시비하는 것은 양쪽 모두 마찬가지, 서로 다를 바 없는 짓을 하면서 서로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한 교수와 고 이사장 등, 이들이 다 누구냐고. 전 국민이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집안 내력까지 다 알아야 할 정도로 위대한 인물들이냐고.
그렇지 않다는 것은 양쪽 진영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느냐? 상대를 공격하기 좋은 수단이자 방법이기 때문이다. 싸움의 법칙 하나, 앞으로 나서는 자나 눈에 띄는 자를 상징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그를 찔러 ‘본때’를 보여라. 바로 그 법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치사하고 비열한 짓이다. 스스로 민족사관을 자랑하는 진보 좌파 인사들에게 물어보자. 이 모두 누가 하던 짓들이더냐? 식민지 치하의 형사들이나 하던 짓 아니더냐? ‘빨갱이’라면 치를 떠는 보수 우파 인사들이나 언론에 물어보자. 이 모두 누가 하던 짓이더냐? ‘빨치산들’이나 하던 짓 아니더냐? 나라를 얼마나 쪼개어 놓고 싶어 이러나.
말하는 김에 한마디 더 하자. 국정화를 찬성하는 사람들을 죄다 친일인사의 자손으로 몰고,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죄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집을 의도를 가진 좌파로 모는 단순 논리는 또 뭐냐? 혐오하며 배운다 했던가? 극단적 진영논리는 어떻게 이렇게 닮았나.
논쟁을 하려면 바르게 해라. 건국을 언제로 보느냐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상하이임시정부의 국체와 이념이 무엇이었고, 그것을 우리의 뿌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또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진지하게 토론해라. 친일의 자손은 이쪽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저쪽이라는 식의 선동을 해서 되겠는가. 욕하고 모독할 일이 아니라 설명하고 설득할 일이라는 뜻이다.
부탁이다. 이쪽을 지지하는 사람이든 저쪽을 지지하는 사람이든 함부로 파렴치범이나 변절자로 공격하지 마라. 인격 모욕은 더욱 하지 마라. 그것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 역사의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범죄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