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연에서 점점 멀어지듯이 사실 눈도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고향의 대숲이나 텃밭 마른 수수대궁에 내리던 눈, 마당가 엎어진 개밥그릇이나 장독대에 쌓이던 눈은 이제 과거를 잃어버렸다. 도시에 내리는 눈은 빌딩 숲을 헤매거나 길을 잃는다. 쉴 곳이 없고 예전의 순백하고 깨끗한 눈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을 더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눈 온다
마을의 개들이 좋아하겠다
아버지는 눈 오는 날
피나무 두레반을 만들거나
손바닥에 침을 뱉어가며 멍석을 맸다
눈 온다
술심부름 갔다 오는 아이처럼
가로등 아래 눈 온다
저녁이 좋아하겠다
아버지는 어느 해 겨울 기어코
그 멍석으로 당신의 문상객을 맞았다
눈 온다
눈은 와서
마을의 지붕을 덮는다
불빛 환한 창들이 좋아하겠다
지저분한 나라도 좋아하겠다
눈 온다
어둑한 골목길로 눈은
천방지축 돌아다닌다
눈은 자기가 눈인 줄 모르지만
눈에게도 옛집이 있어서
거기 가서 내리고 싶어 한다
「옛집」『현대시학』10월호
눈은 거저 내린다. 무엇이든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소유하거나 즐길 수 없는 세상에 어느 날 낮게 내려앉은 하늘이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녁에 눈은 온다. 천지를 하얗게 뒤덮는 그 아름답고 거대한 것이 제 발로 거저 오다니….
언젠가 국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눈을 독점하고 내리는 양이나 그것을 즐기는 정도에 따라 세금을 매길 날이 올지도 모른다. 혹은 이를 민영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의 상상력에 세금을 부과하는 정부는 아직 없지만 산천에 흐르는 물을 병에 담아 돈을 받거나 지구의 산소를 상품화하고 있는 게 현실이니 해보는 말이다.
눈은 고요적적한 산중에도 내리고 달리는 자동차 바퀴자국에도 내린다. 높다란 아파트 지붕에도 내리고 달동네의 연탄재 위에도 내린다. 그러나 눈은 저 자신이 눈인지도 모르고 아직은 천지사방 무엇하나 가리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