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180조 원 대규모 투자가 국내 중소기업계의 지형까지 바꿀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IT뿐 아니라 자동차 하드웨어 부품 업체들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기존의 수많은 IT 하청업체와 자동차 부품 업체 간 영역이 파괴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국내 자동차 하드웨어 부품 업체들과 협력을 추진 중이다. 180조 원 투자를 구체화하는 차원에서다.
이 같은 움직임은 자동차 업계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다. 최근 현대기아자동차는 1차 협력사들에 자동차 산업의 변화 추세에 맞춰 IT업체와의 협력을 당부했으며, 벤처기업협회 등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기아차에서 부품사들에 ‘스마트카니 전기차니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준비가 필요하다’며 부품에 IT를 접목해 보라는 주문을 내렸다”고 전했다. 이어 “벤처기업협회가 IT업체에 완성차 1차 협력업체 부품 리스트를 주고 해당하는 사업이나 아이디어가 있으면 제안해 볼 것을 권유하고 있으며, 완성차 1차 협력사 역시 IT기업들과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선 이미 IT·전장부품 기업과 하드웨어 업체 간의 융복합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동차부품 회사 보쉬는 라이다(LiDAR) 센서 업체 테트라뷰에 투자했고, 이스라엘 라이다 센서 업체 이노비즈는 네이버로 투자를 받아 화제가 됐다. 삼성벤처투자로부터 투자를 받은 미국 쿼너지는 현대자동차 제네시스 ‘EQ900’에 라이다를 탑재시켰다. 삼성, 도요타 등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끌어낸 이스라엘 차량용 통신 반도체 설계 업체 오토톡스는 현대차와 커넥티드 카의 두뇌 역할을 수행하는 통신 칩세트 개발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코다코가 LG전자·만도 등을 통해 GM 전기차 ‘볼트’에 공조장치 부품을 공급하고 있으며, 현대차·기아차·한국GM 등으로는 엔진, 변속기, 조향장치, 공조장치를 납품하고 있다. 삼성이 2대주주로 있는 에이테크솔루션의 경우 올 3월 말 기준 주요매출처는 삼성계열(29.1%)과 현대모비스(16.5%) 등이 차지하고 있다. 자동차와 IT업계의 경계선이 희미해져 가고 있으며, 삼성과 현대차의 공통 협력사도 많아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국내 여건도 ‘삼성과 자동차 부품 회사의 결합’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자동차 부품회사들은 최근 현대기아차의 실적 부진, 한국GM 사태 등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국내 상장 24개 자동차 부품사들의 올 1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582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6.4%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 부품업계에서는 현대기아차만 바라볼 수 없다는 인식이 많아지고 있다. 전장사업을 강화하는 삼성은 자동차 부품업체들에 매력 있는 새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삼성은 협력사 지원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예산을 늘리기로 하면서 자동차 부품 기업들을 협력사로 끌어안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삼성은 1~2차 협력사 중심으로 운영해 온 협력사 지원 프로그램을 3차 협력사까지 확대하고 규모를 4조 원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지난해 기준 삼성전자의 1차 협력사는 2436개에 이른다.
한 협력업체 관계자는 “이제 IT 중소기업은 삼성에, 차 부품기업은 현대차에 납품한다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며 “삼성의 광범위한 투자가 중소기업의 생태계를 융합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