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에서는 '담징'도 만나고, '영운'도 만나죠"

입력 2018-09-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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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언론학자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 자전적 실연소설 '눈 속에 핀 꽃' 출간

▲김민환 교수는 최근 두 번째 장편소설 '눈 속에 핀 꽃'을 냈다. 책은 순수하게 사랑에 빠지고 세상의 불의를 참지 못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몸을 던진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고이란 기자 photoeran@)
'인생 2모작'이라고 했던가. 자신도 "언론학에 갇혀 산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언론학 외길 인생을 달려왔는데, 8년 전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이후 소설 쓰기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장편 소설인 역사소설 '담징'은 5쇄까지 찍었고, 최근에는 두 번째 장편 소설 '눈 속에 핀 꽃'을 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해 30년간 언론학을 가르쳤던 김민환(73)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얘기다. 원로 언론학자인 그도 문단에서는 신인이나 다름없다. 50여 년간 눌러 담은 소설가로서 꿈을 차근차근 펼치고 있다.

'담징'과 '눈 속에…'는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도에 지은 남은재(南垠齋)에서 탄생했다. 2010년 퇴임 이후 지은 곳이다. '눈 속에…'에는 1960~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의 고뇌와 방황, 좌절과 분투가 어려 있다. 역사와 함께 저자의 자전적 연애담, 아니 '자전적 실연담'이 책의 큰 줄기를 이룬다. '언론학자'가 아닌 '소설가' 김 교수를 지난 6일 서울 중구 서소문로 J빌딩에서 만났다.

"오랫동안 언론학자로 살아왔지만, 저는 원래 기자가 된 뒤 소설을 쓰는 게 꿈이었어요. 대학을 신문방송학과로 간 이유도 그것이었죠. 대학 때 3선개헌 반대 시위 등 시대적 격랑에 휩싸이다 보니 언론계로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교수의 추천으로 대학원에 가서 교수의 길을 걷게 된 거죠."

책은 주인공 최영운이 어느 가을날 종이상자에 담긴 편지 묶음을 받는 것에서 출발한다. 50여 년 전 가슴 속에 품었던 여학생 서윤희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이다. 영운에 김 교수의 추억이 온전히 투영됐다.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나 결핵을 앓다 대학에 4년이나 늦게 들어온 것도, 글솜씨가 빼어나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종신 집권 시도에 반대하는 선언문과 격문을 도맡아 쓴 것도, 당국으로부터 주동자로 몰리면서 정학 처분을 받게 되면서 기자가 된 뒤 소설가가 된다는 꿈을 저버린 것도 김 교수의 과거 모습 그대로다.

"자전적 실연 소설이에요. 연애소설이라고 하기엔 연애를 한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윤희'도 '화영'도 결국 이뤄지지 않았잖아요. 시대 상황은 사실과 거의 부합한다고 보면 돼요. 당시 신문이나 사진지, 책들을 보면서 참고했어요. 핵심 인물들도 주변 인물을 그대로 그려냈고요. 노동운동 쪽으로 나가서 노동자로서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이들이요. 인물들의 심리는 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어요. 되도록 사실과 근접하게 가되, 소설적 요소를 가미한 거죠."

책을 읽다 보면, 영운과 윤희가 서로에게 보낼 편지를 썼을 1967년 1월 1일 0시 5분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가 있는 윤희를 대신해 딸 수민이 영운에게 편지를 보내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 틈에서 암울했지만 뜨거웠던 청춘이 피어난다.

자극적인 요소는 되도록 넣지 않았다. 지나치게 담백한 탓일까. 절친한 감독으로부터 '김 선배 소설은 어느 국면에서 주먹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고. 김 교수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한문을 배운 제가 사랑을 무책임하게 그려낼 순 없지 않으냐"며 "최영운이 '나'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주인공의 여러 퍼스널리티를 정제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눈 속에 핀 꽃' 표지.(중앙북스)
무엇보다 연애 소설이 더 큰 울타리를 넘지 못한 이유는 '집사람' 때문이다. "집사람이 보길도로 내려와 살아보더니 요즘은 저보다 보길도를 더 좋아해요. 처음에는 그렇게 반대하더니, 이제는 서울에 올라간다고 해도 따라오지 않아요. 집사람이 있어 생활은 편하지만, 존재 자체가 소설적 상상력을 제한합니다. 도무지 이야기가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니까요. 하하."

영운은 혁명과 학문의 갈림길에서 고뇌했지만, 노동운동이 아닌 교수의 길을 택했다. 매화 같은 여자 윤희는 끝까지 찬 곳에서 민중과 함께했다. 영운의 삶의 지표였던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청계천에 들어가 민중과 산 윤희 집 가훈이 된다.

우연한 기회에 법정에서 마주한 윤희는 '큰 사람'이었다. "아, 내가 문제 학생들에 관한 지도 보고서를 쓰는 조무래기로 왜소해진 동안에, 윤희는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되었구나." 영운의 말을 김 교수는 그대로 되뇌었다.

오랜 기간 억눌러졌던 그의 문학적 감수성은 '담징'에서 처음 폭발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김 교수는 '종이는 누가 처음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가졌다. 일본서기에서 서기 610년 고구려 승려인 담징(579~631)이 국사로 일본으로 건너가 종이와 채색화, 맷돌을 처음 보급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7세기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어려웠어요. 제 전공인 언론의 역사는 커뮤니케이션 역사의 일부입니다. 자연스럽게 종이의 역사에 관심이 쏠렸죠. 종이는 한지가 최고예요. 1000년 가는 책은 한지로 만들어진 책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무리 역사를 뒤져도 한지를 누가 만들었는지 나와 있지 않아요. 그런데 일본서기에 담징이 일본에 종이를 처음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었던 거죠."

김 교수는 일본 나라 지역을 세 번 다녀오고,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교 서적 40~50권을 읽으면서 담장이 종이 외에도 맷돌, 칠기 등을 일본에 전파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김 교수는 "국사가 민초들에게 맷돌과 칠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느냐"며 "불심은 민중에게도 있다는 생각으로 담징이 탁발을 하고 다녔다고 추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저에게 가난과 결핵은 굉장히 좋은 선생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이란 기자 photoeran@)

"학승이었던 담징은 수행 중에 욕을 떨치기 위해 노력했을 거예요. 왕사이기 때문에 권력욕과 물욕은 없었겠죠. 남은 것은 애욕입니다. 1949년 불타 없어졌지만, 담징이 금당벽화에 철학이 녹아있는 미륵불을 그리면서 겪었을 애욕의 수행을 담아낸 거죠. 사랑했던 여인의 눈을 보고 눈동자를 그릴 수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학승의 연애를 그려내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고승들을 만나며 조언을 얻었죠."

'담징'을 쓰면서 고증에 고증을 거듭한 과정을 들으니, '눈 속에 …'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5년이 걸린 이유를 짐작하게 됐다.

인터뷰를 마치며, 제2의 인생을 사는 '소설가' 김 교수에게 청춘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본인의 표현처럼 '남들이 은퇴할 나이에 꿈을 이룬' 그가 생각한 청춘들의 미래가 궁금했다.

"저는 어렸을 때 가난과 신병을 한탄하고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훌륭한 선생이었습니다. 청춘들이 거친 광야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가시덤불 헤치면서도 자기 길을 개척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영화감독 임권택이 한국영화 현대화에 미친 영향, BTS가 우리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을 논문으로는 제일 잘 써요. 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는 임권택도 BTS도 될 수 없죠. 부딪치고 도전하고 거칠게 사세요. 불안정한 모습 속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그릇을 키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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