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싶어요.”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독일 영화 ‘24주’는 출산을 석 달 앞두고,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란 사실을 접하게 된 엄마의 고뇌를 그린다. 출산을 앞두고 느꼈던 설렘과 행복은 순식간에 휘발된다. 낙태와 출산 사이에서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엄마의 거친 번민만이 여배우의 일그러진 얼굴 위로 드러난다. 여배우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섬뜩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독일은 낙태가 합법인 국가다. 임신부의 요청 시 낙태 시술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은 낙태를 단순히 합법 혹은 불법으로 가늠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로 낙태를 결정해야만 하는 엄마의 고뇌를 좇아가며, 그 결정이 절대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낙태의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함부로 내릴 수 없음을 부드럽게 지적한다.
대한민국도 원치 않는 임신에 낙태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11일 헌법재판소는 임신 초기 낙태까지 전면 금지하는 형법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불합치란 해당 법률이 위헌이지만, 즉시 무효로 할 경우 법의 공백이 생기고 사회적 혼란이 유발되므로 국회에 시한을 주고 법 개정을 유도하는 결정이다. 이번 헌재 결정에 따라 국회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을 개정해야 한다.
여성단체들은 헌재의 이번 판결이 국가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고, 안전한 낙태를 위한 보건의료 제도를 확충하게 될 것이라며 환영의 뜻을 보였다. 반면, 종교계는 무고한 생명을 직접 죽이는 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이고, 태아의 기본 생명권을 부정하는 일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낙태죄 위헌 판결은 1953년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헌법이 제정된 지 66년 만이다. 역사적인 판결에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낙태죄 폐지를 두고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이에 뉴스랩부 나경연 기자와 사회경제부 이신철 기자가 남녀의 관점에서 낙태죄 폐지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가감 없이 나눴다.
◇‘낙태죄 폐지’, 남성들 안일하게 만든다?
나경연 기자(이하 나): 제가 11일 헌법재판소 낙태죄 위헌 판결이 내려지는 날, 오전부터 헌법재판소 앞에 있었거든요. 많은 시민과 낙태죄 폐지 찬반 집회에 참여하는 운동가들을 만났어요. 그중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분들 다수는 낙태죄 폐지로 남자들이 더욱 문란하게 성생활을 즐기고, 책임은 여자에게 떠넘기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저도 여기에 동의해요.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과 그 책임을 이행하는 방안으로 낙태가 무분별하게 강요될 것 같아요.
이신철 기자(이하 이): 저는 제도와 의식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낙태죄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남성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애인과의 관계에서 평소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낙태죄가 있든 없든 여자친구의 임신 사실을 듣고 나면 청혼을 한 뒤 함께 키우자고 말할 거예요. 하지만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낙태죄 유무에 상관없이 무조건 지우라고 말하겠죠. 결론적으로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죠.
나: 그래도 낙태가 가능해지면 남성들이 임신을 더 가볍게 여기진 않을까요? “임신이 돼도 뭐 어때. 낙태하면 되는데”라는 생각으로 피임에 소극적으로 임할 것 같아요. 낙태죄가 있을 때는 혹여나 여자친구가 임신할까 봐 콘돔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던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낙태죄가 폐지되면 낙태라는 방법이 있으니 굳이 콘돔을 사용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물론 꼭 남성의 문제는 아니겠죠. 여자도 귀찮다거나 번거롭다는 이유로 피임에 안일해질 수 있겠죠.
이: 저는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봐요.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낙태를 취미로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낙태를 즐기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고요. 낙태죄가 폐지되더라도 낙태라는 것은 그 사람이 불가피한 상황, 극한의 상황에서 선택하는 최후의 선택지일 거예요. 낙태가 만능 지팡이라도 되는 것 마냥, 낙태가 가능하니까 이제 성생활을 더 문란하게 해야지, 피임을 안 해야지, 피임보다는 쾌락에 집중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란 뜻이죠.
◇‘임신 초기’ 기준은 몇 주?
나: 이번 헌재 판결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임신 초기를 몇 주로 지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요. 낙태를 임신 초기라는 기간에 한해서만 허용한다는 조건을 명시했기 때문이죠. 헌재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을 세계보건기구(WTO)가 인정한 임신 22주부터라고 명시했어요. 법조계와 의학계에서는 임신 12주와 임신 24주 사이에 태아 자의식이 생성된다고 보고 있죠. 과연 이 기준을 명확히 정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이: 저는 토론 준비하면서 몇 가지 찾아봤거든요. 제가 찾아본 바에 따르면 태아는 15주부터 성별 감별이 가능하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15주 전까지, 성별 감별이 불가능한 기간까지만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봐요.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 남아선호사상은 정말 강하잖아요. 지금 2019년에도 남아선호 사상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어요. 제 주변에만 봐도 남편이 몇 대 독자라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요.
나: 그래도 시대가 변하면서 남아선호사상은 점점 없어질 것 같아요. 요새는 딸들이 효도를 많이 한다고, 아들보다 딸을 원하시는 부모님들도 많고요. 단순히 남아선호사상에 의한 낙태를 막기 위해 기준을 15주로 하는 것은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 아닐까요?
이: 남아선호사상 때문은 아니에요. 요새는 성별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려는 부부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예를 들어 첫째는 아들을 낳고 둘째·셋째는 딸을 낳고 싶은데, 첫째도 아들이고 둘째도 아들이라는 말을 들으면, 낙태를 통해 인위적으로 셋째의 성별을 맞추는 것이죠. 그래서 부모의 특정 성별선호사상에 의한 낙태가 이뤄지는 것을 막기 위해 15주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싶어요.
◇낙태 시술, 지나친 상업화는 안 돼!
나: 불법적인 낙태 시술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 것은 굉장히 바람직한 현상 같아요. 이제는 낙태 시술도 의료 서비스의 하나로 편입될 테고, 여성들은 훨씬 퀄리티 높은 의료 서비스를 통해 건강권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일본 같은 경우는 19487년부터 낙태를 허용했어요. 단, 낙태 시술의 전문성, 여성의 안전성을 고려해 국가가 지정한 병원에서만 낙태 시술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이: 그런 식으로 낙태는 허용하되, 국가가 어느 정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봐요. 낙태 시술이라는 것은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선택하게 되는 유일무이한 대안이잖아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만약 낙태 시술이 상업화돼서 각 병원이 지나친 광고에 뛰어들고, 광고 비용을 시술 비용에 전가하게 되면 낙태 시술 비용은 계속 오를 거예요. 막상 환자들은 너무 비싸서 낙태 시술을 받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국가가 어느 정도 개입해 낙태 시술의 지나친 상업화를 규제하고, 적정한 시술 가격을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나: 맞는 말이에요.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위해 낙태죄 시술을 허용했는데, 오히려 이 결정이 특정 의료 분야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문제가 심각하겠죠. 여성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적정한 규제가 필요한 영역인 것 같아요. 단, 낙태죄가 폐지되더라도 낙태 비용을 남녀가 함께 부담하는 법은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아요.
이: 그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지금은 낙태죄가 있으니까 남녀 모두 공동정범이라는 범위에 묶여 강제로라도 책임을 나누잖아요. 낙태죄 폐지 후에는 남자가 낙태 시술에 대한 경제적 책임을 여성에게 전부 떠넘기고 도망가도, 책임을 물을 방법이 하나도 없죠.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사람의 양심인데, 양심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바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