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여파가 금융 분야에서는 ‘자금 회수’로 악용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금융당국과 은행권에서는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는 진단을 재차 확인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은행과 카드사 등 여신전문 금융사들이 일본으로부터 빌린 자금 규모가 17조원(6월 말 기준)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1년 내 만기가 돌아오는 물량은 8조원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경제 도발이 금융권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 금융사들의 신용등급이 높아 일본이 자금을 회수하더라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와 같은 위기는 겪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본계 금융사들이 신규 대출과 롤오버(만기 연장)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회수하는 것이다. IMF 외환위기 때도 일본계 금융사들은 한국으로 흘러간 자금을 회수했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와 달리 대체조달 창구를 쉽게 찾을 수 있고, 만기 기한도 제각각이라 대처할 여유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은행들은 이미 외화 유동성 관리의 일환인 커미티드 라인(committed line) 설정으로 대비를 했다는 입장이다. 커미티드 라인은 금융회사 간의 거래에서 유사 시 달러를 우선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쉽게 말해 자금 인출 우선순위를 보장받는 것이다. 단기 외화 대출 성격으로 빌리는 측은 일정 규모의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A은행 자본시장부 관계자는 “일본계 은행뿐만이 아니라 엔화 관련해서는 여러 기관과 협약을 맺고 있고 한도도 충분하다”며 “굳이 커미티드 라인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지 않아도 현재 상황에서도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말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커미티드 라인 설정은 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금리가 비싸기 때문에 거의 사용할 일이 없다”고 덧붙였다.
B은행 자금부 관계자는 “엔화 의존도는 높지 않아 유동성에는 문제가 없으나, 혹시라도 유동성부족이 생기면 그때그때 채권발행이나 중장기차입 등을 통해 충당할 여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은행들과 일본 수출 규제 관련 금융 부문 점검 태스크포스를 운영 중이다. 이를 통해 일본계로부터 조달한 대출과 외화채권 만기도래 현황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국내에 들어온 일본계 자금은 주로 제조업 등 우량 대기업에 나간 대출로 안정성이 확보돼 있는 편”이라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고, 아직 만기 연장이 막히는 경우도 없어 위기 진단은 이르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컨틴전시 플랜을 보완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실행돼 국내 기업이 피해를 보는 경우 이들 기업에 대한 금융지원 방안도 마련해 놓고 있다. 대출이나 보증 등 형태로 긴급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 첫 번째 조치다. 하반기 중 공급하기로 한 10조 원 상당의 정책금융 자금, 7조5000억 원 상당의 무역금융 자금을 우선 활용하고 필요하면 추가 재원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1997년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등 대형 위기를 극복해본 경험이 있어 위기 상황으로 비화하면 바로 내일이라도 대책을 내놓을 준비가 돼 있다”면서 “다만 금융 분야에서 일본의 보복은 발생 가능성이 작고 발생하더라도 대응 여력이 충분하다는 점에서 현실을 불필요하게 왜곡해서 어렵게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