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으로 고추장을 찍어 먹어 보는 맛.’ 안도현 시인은 필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글도 고추장을 찍어 먹듯 직접 베껴 써야 그 맛을 안다는 뜻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직접 필사의 깊은 맛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서점가에서는 일찍이 문학작품을 보고 쓸 수 있는 필사책을 내놓았는데 시집부터 고전 문학, 성경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미료의 독서노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미료 씨는 "필사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취미"라고 소개한다. 필사하다 보면 마음에 해로운 잡념이 줄어 마음이 건강해지고, 이것이 몸의 건강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료 씨는 유튜브뿐만 아니라, 글쓰기·필사 모임 코치 등 독서 관련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작가다. 2019년 '혹시 이 세상이 손바닥만 한 스노볼은 아닐까'라는 이름의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그가 처음 필사를 시작한 건 3년 전. 오랜 호주 생활로 인해 생긴 모국어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바쁜 외국 생활로 3~4년간 책을 멀리하다가 한글에 대한 갈증으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시기가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돌이켜보는 터닝포인트가 됐죠."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기록을 남겨야겠다 생각이 들어 독서 노트를 시작했고, 기록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독서보다 기록이 더 재밌어졌다고 한다.
미료 씨는 필사의 장점으로 "책을 완독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점을 꼽았다. 현재 필사 모임에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있는데,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한 챕터 읽고 말았을 두꺼운 책을 필사 덕분에 7일 만에 반이나 읽었다고 한다.
필사는 문장력을 키워주는 데도 도움이 된다. 실제로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글쓰기 훈련을 위해 필사를 한다. 미료 씨 역시 독서 노트를 쓰고 나서부터 예전보다 비문을 덜 쓰게 되었다고. 독서 노트에 감상평이나 느낀 점 등 자기 생각을 글로 옮긴 것이 문장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필사를 시작한 이후 삶의 전반이 변화했다고 말했다. "책이나 글쓰기와 관련된 변화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체질 개선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며 "변덕스럽고, 인내심 없고, 산만하고, 정리정돈이 잘 안 되던 습관이 같이 개선됐다"고 덧붙였다.
사실 독서와 필사는 꾸준한 노력이 없다면 작심삼일로 끝나기 쉬운 취미다. 이때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필사 모임이 동기 부여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미료 씨는 '재밌어서 씁니다'라는 이름의 온라인 독서 모임을 작년 8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매일 30일 동안 필사 인증사진을 채팅방에 공유하는데, 이를 통해 서로의 독서습관과 필사 결과물을 칭찬하고 격려한다.
미료 씨는 처음 필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재밌게 하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재미없으면 안 해도 된다.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솔직함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관심사에 맞는 책을 읽고, "노트와 펜 한 자루 만큼은 튼튼하고 내 마음에 꼭 드는 걸 사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장비에 애착을 갖는 것도 독서노트를 재밌게 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몸과 마음이 힘든 요즘. 미료 씨는 지친 사람들에게 에리히 프롬이 쓴 책 '사랑의 기술'을 읽어보라고 추천했다. 그는 이 책을 읽으며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어떤 지옥 속에서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지치는 일상 속에 점점 사랑의 의미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을 필사하며 그 의미를 다시금 써내려가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