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가 낮추기에 매달려 협상 지연
경험 전무한 EC의 백신 협상 주도도 패착
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국가별 백신 접종률은 이스라엘 55%, 영국 14%, 미국 9.4%다. EU는 2.8%에 불과하다. UBS는 현재 추세로는 올해 인구의 3분의 1이 접종을 끝내는 국가가 유럽에서 몰타와 루마니아뿐이라고 분석했다. 코로나19 확산 차단을 위해 지난해 여름부터 일찌감치 백신 조달 계획에 착수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다.
이에 다급해진 EU는 제약사에 책임을 지라며 압박에 나섰다. 지난달 27일 스텔라 키리아키데스 EU 보건 담당 집행위원은 “제약사와 백신 생산업체는 계약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아스트라제네카가 EU에 백신 공급을 하기로 한 공장 4곳 중 2곳은 영국에 있다”면서 “영국 공장에서 생산된 물량은 우리 구매 계약의 일부분이다. 영국 공급 물량을 EU에 제공하라”고 압박했다.
앞서 아스트라제네카가 올 1분기 백신 공급분이 당초 계획했던 약 1억 회분의 절반에도 못 미칠 것이라고 발표하자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제약사 때리기에 나섰지만 백신 공급 차질은 EU가 자초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계약 초기 백신 단가를 낮추는 데 지나치게 매달렸다는 평가다. 다른 정부가 제약사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책임을 면제해주면서 신속한 공급에 사활을 걸었던 것과 대조된다. 가격 인하에 초점을 맞춘 결과, 화이자와 바이오엔테크 백신의 1회분 유럽 공급 단가는 미국보다 훨씬 저렴하다.
그러나 가격에 매달리면서 협상이 정체됐고 주문 및 승인 지연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5~7월 공급 계약을 체결한 데 비해 유럽은 8월 말~11월이 돼서야 가능했다.
그 기간 유럽 내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 손실을 감안하면 단가 낮추기 전략은 실패에 가깝다.
백신 개발업체 임원은 “국가별 백신 배분에서는 먼저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백신 구입 경험이 전무한 유럽 집행위원회(EC)가 협상을 주도한 것도 도마에 올랐다. 지난해 6월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는 백신업체와 진행하던 협상 주도권을 EC에 넘겼다. EC는 주로 EU 법안을 마련하고 각국 정부의 승인을 받는 역할을 해왔다.
이들은 수개월이 걸리고 심지어 수년이 걸리기도 하는 무역협상 방식을 그대로 썼다. 조속한 합의보다는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는 데 방점을 둔 것이다.
EU 백신 계약을 담당한 산드라 갈리나 EU 보건·식품안전 담당 국장은 가격인하와 함께 부작용 발생 시 업체에 법적 책임 지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영국, 미국과 달리 보조금 제공도 꺼렸다.
미국은 코로나19 백신 개발 프로그램인 ‘초고속 작전(Operation Warp Speed)’에 따라 3월부터 보조금을 제공, 그 대상에 유럽 제약사도 포함시켰다.
EU가 백신 공급 차질에 불만을 드러내고 기업 때리기에 나섰지만 정작 패착은 스스로에게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