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일부 슬롯 반납ㆍ운수권 재배분 조건…"외항사 반사이익ㆍ고용 유지 부담 우려"
공정거래위원회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조건부 승인하기로 잠정 결정하자 업계에서는 항공 경쟁력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30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일부 슬롯(비행기 이착륙 횟수) 반납과 운수권 재배분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을 승인하는 내용의 심사보고서를 전원회의에 상정했다고 전날 밝혔다.
공정위가 내건 승인 조건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운항을 축소하는 대신 LCC(저비용항공사) 등 새로운 항공사의 진출을 허용하는 방안이다.
공정위는 노선별로 경쟁 제한성을 판단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운수권과 슬롯을 회수하겠다는 계획이다. 슬롯은 공항에서 항공기가 시간당 이착륙할 수 있는 최대 횟수를 뜻한다. 항공사는 출발, 도착 공항의 슬롯을 각각 확보해야 비행기를 띄울 수 있다.
2019년 기준 대한항공의 인천국제공항 슬롯 점유율은 24%, 아시아나항공은 16%다. 계열사 LCC인 진에어(6%), 에어부산ㆍ에어서울(3%)을 합쳐도 점유율은 50%를 넘지 않는다. 단, 탑승객이 많은 낮 시간대에는 양사의 점유율이 57%까지 높아진다. 결국,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탑승객이 몰리는 시간대의 슬롯을 반납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정위는 양사 합병 시 인천~뉴욕 등 10개 노선이 100% 독점 상태에 놓인다고 분석했다. 공정위는 이 밖에도 사실상 독점이 되는 노선까지 포함해 슬롯 일부를 반납하는 방식으로 독점 문제를 해결하라고 대한항공에 요구했다. 반납이 필요한 노선이나 슬롯 수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양사가 반납한 슬롯은 다른 항공사가 인수하게 된다. 국내 LCC뿐 아니라 외항사도 이를 취득할 수 있다.
공정위는 아울러 항공 비자유화 노선에서 잔여 운수권이 없으면 양사의 운수권을 회수해 LCC에 재배분할 방침이다. 운수권은 국가 간 항공 협정을 통해 각국 정부가 자국 항공사에 배분하는 운항 권리로, 외항사에는 배분할 수 없다.
현재 인천~런던, 인천~파리, 중국 노선, 동남아ㆍ일본 일부 노선이 항공 비자유화 노선이다. 항공 자유화 협정이 맺어진 미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운수권을 확보해야 운항할 수 있다. 현재 양사는 유럽 노선 운수권 대부분과 터키, UAE, 인도, 인도네시아 노선 운수권도 100% 보유하고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심사보고서를 송달받으면 구체적인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당사의 의견을 정리해 공정위와 협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공정위가 지나치게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며 통합 항공사의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는다.
우선, 항공업계는 양사가 통합해도 인천국제공항의 여객 슬롯 점유율이 40%에 불과해 독과점 우려가 없다고 본다. 실제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점유율은 국제 항공사의 허브공항 슬롯 점유율과 비교하면 낮은 수치다. 아메리칸항공의 댈러스 공항 슬롯 점유율은 85%에 달하고, 델타항공의 애틀랜타 공항 점유율은 79% 수준이다.
통합 항공사의 고용 유지도 어려울 수 있다. 양사 항공편 운항이 줄어들면 일감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이 통합 시 인위적 구조조정은 없다고 분명한 입장을 냈지만, 운항 축소는 장기적으로 고용 유지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있다.
자칫 외항사만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공정위 조건대로 장거리 노선을 반납해도 LCC는 장거리 운항 능력이 없기 때문에 외항사가 이를 가져갈 수 있어서다. 이는 국가 항공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LCC가 장거리 운항이 가능한 항공기를 도입할 수는 있다. 티웨이항공은 내년에 중대형기 A330-300 3대를 도입할 예정이고, 신생 LCC 에어프레미아는 장거리 운항이 가능한 보잉 787-9기를 도입한 상태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국적 항공사 운항 축소는 소비자 권리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가 스스로 제한을 두면서 국가 항공 경쟁력을 약화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