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청문회와 보고서 채택, 대통령 임명까지 최소한 보름 이상 진행된다는 점을 보면, 한국은행 총재 자리가 당분간 빈다는 얘깁니다.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한국은행 총재가 비면 안 된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나왔지만, 공석은 현실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은행 총재는 왜 중요할까요.
먼저 중앙은행의 역할을 아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은행과 달리 중앙은행은 각 나라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세운 은행이지요.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통화신용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입니다. 경기가 침체국면에 들었을 때는 화폐 공급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고, 활황국면에 접어들면 돈줄을 죄어 경기과열을 억제하려 합니다.
다시 말해 돈의 가치, 즉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수많은 호황과 불황을 겪은 자본주의 체제가 경기 급등락을 줄이기 위해 고안한 발명품인 셈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수단은 중앙은행과 민간 금융회사 간 거래의 기준이 되는 기준금리의 결정입니다. 기준금리를 내리면 돈의 공급이 늘어나고 올리면 줄어들죠. 기준금리의 변화는 가계나 기업의 경제활동, 물가, 환율, 주가 등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은행은 총재를 포함한 7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금융통화위원회를 연 8회 열어 기준금리(현재 연 1.25%)를 정하고 있습니다.
이주열 전 총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발생 직후인 재작년 3월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5%포인트(p) 내려 경기 하강 속도를 늦췄고, 경기가 다시 회복되고 물가 상승 조짐이 보이자 작년 8월부터 금리를 올려 상황에 대처해 왔습니다.
금리 결정은 데이터에 기반을 둡니다. 이를 위해 한국은행은 경제조사 및 연구를 통해 국내외 경제 움직임을 면밀히 분석하고 관련 자료를 만듭니다. 국내총생산(GDP) 및 국민총소득(GNI)과 같은 국민계정이나 무역수지를 포함한 국제수지표 등이 한은이 작성하는 대표적 통계입니다.
다만 금통위원들이 수치만 보고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사회 이슈와 여러가지 경제 상황을 보고 최종 결정을 합니다. 자신만의 경제 철학도 중요합니다. 한은 총재의 경우, 금통위 회의를 주도하고 나머지 6명 위원의 의견이 반으로 갈릴 때 캐스팅보트 역할 등을 수행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입니다.
최근 글로벌 경제는 불확실성의 연속입니다. 오죽하면 이주열 전 총재가 퇴임사를 통해 “최근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코로나 위기 이후 경제 예측이 어긋나고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졌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 역시 높은 불확실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저명한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도 경제전망을 점성술에 비유하지 않았겠냐”고 토로했겠습니까.
그는 “특히 코로나 이후 가계부채 누증 등 금융불균형이 심화되고 금융위기 후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나타나면서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정책체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또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며 “성장을 지키면서도 금융안정과 함께 물가를 잡을 수 있는 묘책이 요구되는 상황”이라고도 했습니다.
일본이 긴 불황의 터널에 갇혔던 이유 중 하나는 냉탕과 온탕을 급하게 오간 일본은행의 헛발질 탓이었습니다. 현대사회는 중앙은행이 국내외 흐름을 정확하게 읽는 통화정책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면 쉽게 요동치게 됩니다. 금리의 칼자루를 쥘 한국은행 총재의 중요성이 큰 이유입니다.
실제로 이주열 전 총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도 있지만, 작년 8월과 11월, 올 1월에 걸친 세 차례 금리 인상은 인상적인 결정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전 총재 역시 “작년 8월 인상 시점에는 미국 중앙은행(Fed)도 인상을 안 하고 코로나19 해결도 멀었는데 왜 금리를 인상하느냐는 비판 여론도 있었다”며 “우리는 경기 전망도 괜찮고 물가도 오를 거란 판단 아래 어려운 결정을 했다. 그때 정상화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면 지금 따라가기 힘들어 당황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매년 전 세계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 운용 상황을 평가하는 센트럴뱅킹(Central Banking)은 전날 ‘올해의 중앙은행’으로 한국은행을 선정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은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선진국 중 최초로 지난해 8월 적기에 기준금리를 인상했다”고 선정 이유를 들었습니다.
한국은행 역대 총재는 1950년 초대 구용서 총재부터 25~26대 총재를 지낸 이주열 총재까지 총 25명입니다. 이 가운데 이주열 총재가 가장 긴 8년간 재임한 총재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27대 총재로 임명될 가능성이 큰 이창용 차기 총재 후보는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출신으로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획조정단장,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이코노미스트 등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입니다.
학계와 정부, 국제기구 등에서 경험을 두루 쌓은 경제 전문가로 꼽힙니다. 한국은행 총재는 통화정책을 진두지휘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인 만큼, 이론과 실무는 물론 국제 경험까지 겸비한 이 후보자는 한은 총재에게 요구되는 객관적인 조건을 모두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은 직원들도 “금융위 부위원장, IMF 국장 등을 지내면서 조직관리 능력도 검증됐고, 국제적인 감각이나 네트워크도 강점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는 반응입니다.
이 후보는 이날 국회청문회 준비 태스크포스(T/F) 사무실로 처음 출근하는 길에 취재진을 만나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논의되는 통화정책 트렌드는 ‘3C’(Comprehensive, Consistent, Coordinated)”라며 “통화정책뿐만 아니라 재정, 구조조정 정책 등을 통합적으로 보고 정부와 협력해 일관된 정책을 펼쳐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부 정책과 엇박자를 내기보다는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과 성장을 고루 살피는 통화정책을 펼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후보의 총재 데뷔 무대는 5월 금통위 회의가 될 전망입니다. 후보 지명이 좀 더 일찍 됐다면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다음 달 14일 금통위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주재했겠지만, 청문회 등 일정상 빠듯해 보입니다.
금통위 때까지 신임 총재가 취임하지 못하면, 기준금리 결정 등의 안건은 주상영 의장 직무 대행 주재로 논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