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산유국 협의체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가 2일(현지시간) 증산에 합의했다.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궁지에 몰린 미국의 계속된 요청에 화답한 것이다. 그러나 증산 규모와 방식을 뜯어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의도’에 의문이 제기된다. 미국의 증산 요청에 시큰둥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증산을 결정한 배경은 무엇일까.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OPEC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 협의체인 OPEC플러스는 이날 정례 회의를 열고 7~8월 하루 64만8000배럴 증산하기로 합의했다. 기존 증산 규모인 43만2000배럴에서 20만 배럴가량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증산 요청에 화답한 모양새다. 미국은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자 사우디에 증산을 요청해왔다. 미국 물가상승률이 40년래 최고치(8.5%)를 기록한 지난 3월 상승분의 절반을 차지한 게 휘발유를 포함한 에너지였다.
당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대가로 서방사회가 강력한 대러 제재를 가하면서 러시아 원유 생산은 급감했다.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원유 생산국으로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하루 1130만 배럴을 생산, 전 세계 수요의 11%를 담당했다. 공급이 대폭 줄자 유가는 치솟았고 배럴당 139달러까지 오르며 200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원유 공급 부족 우려에 유가가 고공행진하는 와중에도 OPEC플러스는 서방의 추가 증산 요구를 외면했다.
OPEC플러스는 2020년 팬데믹 여파로 유가가 폭락하자 하루 970만 배럴 감산에 합의했다. 이후 코로나발(發) 봉쇄 조치가 차츰 풀리고 수요가 회복 조짐을 보이면서 작년 8월부터 매달 하루 40만 배럴씩 증산에 나섰다. 올해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유가가 급격히 치솟았지만 5월에 이어 6월에도 하루 43만2000배럴 증산으로 버텼다.
미국 백악관은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전략비축유까지 방출하며 사우디에 증산을 압박했다. 그래도 꿈쩍하지 않던 사우디가 이번 증산 결정으로 미국의 요구에 화답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산유국 협의체의 증산 결정을 환영한다며 사우디의 리더십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사우디의 증산 규모와 방식을 살펴보면 ‘조삼모사’의 냄새가 짙다. OPEC플러스는 7월과 8월 하루 64만 배럴 증산하기로 하고 9월 증산 규모는 추후 다시 배정한다고 밝혔다. 7~9월 각 43만 배럴씩 감산하려던 기존 계획과 총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증산에 반대하는 러시아를 고려해 총량에서 차이가 없는 형태를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한 증산 규모 자체가 러시아의 생산량 감소 수준을 상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점도 문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4월 러시아의 원유 생산량은 목표치를 13% 밑도는 하루 910만 배럴로 나타났다. 2월 대비 생산량이 하루 95만 배럴 감소했다.
사실상 산유국의 증산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게 확인되면서 시장 반응도 미지근했다. 이날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은 증산 기대감에 3%가량 하락한 배럴당 111달러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반등에 나섰다. 브렌트유도 배럴당 113달러로 하향 곡선을 탄 후 117달러로 재반등했다.
사우디의 증산은 유가보다는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지렛대’ 성격이 강하다. 사우디와 미국은 오랜 우방국이지만 최근 몇 년 새 관계가 소원해졌다. 미국이 아시아 중시로 외교 전략을 전환한 영향이었다. 2018년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0년 대선 후보 당시 사우디에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든든한 우방이던 미국이 냉랭한 모습을 보이자 사우디의 불만도 커졌다. 예멘의 친이란 세력인 후티 반군과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안보 동맹 의지가 약해졌다고 비난했다.
틀어질 대로 틀어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에 회복 조짐이 피어오른 배경은 인플레이션이었다. 고물가로 지지율이 바닥에 떨어진 미국은 사우디와의 관계 복원 의지를 내비쳤다. 브렛 맥거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중동 담당과 아모스 포치스타인 백악관 수석에너지보좌관은 지난달 말 사우디를 방문했다.
이달 바이든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사우디는 바이든 방문을 계기로 미국의 안보 지원을 받아내려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한 사전 조치로 사우디는 증산 '시늉'을 통해 바이든의 ‘기분’을 맞춰줬을 가능성이 있다.
댄 샤피로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는 “앞뒤가 맞아떨어진다”며 “사우디의 증산 조치는 바이든 순방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했다.
결국 OPEC플러스의 이번 증산 방침은 시장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채 바이든 행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