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3일(현지시간) 대만을 방문해 광폭 행보를 보였다. 중국이 즉각 반발에 나서면서 미·중 갈등 악화를 예고했다.
펠로시 의장은 전날 밤 10시 44분께 대만 타이베이 쑹산공항에 도착한 후 발표한 성명에서 “미 의회 대표단의 방문은 대만의 힘찬 민주주의를 지원하려는 미국의 확고한 약속에 따른 것”이라고 방문 배경을 밝혔다.
대만 도착과 동시에 공개된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는 “이번 방문은 싱가포르와 한국, 일본 등 상호 안보와 경제 협력 등에 초점을 둔 태평양 지역 순방의 일환”이라고 취지를 설명하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을 강화하며 인권과 법치에 대한 무시가 지속하고 있다“면서 시진핑 주석을 비판했다.
펠로시 일행이 대만에 도착하기까지 미·중 양국 사이 군사적 긴장감이 감지되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전날 밤 중국군은 대만 인근 해역 곳곳에서 실탄 사격을 실시했고, 펠로시 의장이 대만 도착 직후에는 공군 전투기 35대가 대만해협을 횡단했다.
펠로시 의장이 탄 전용기는 남중국해에 떠 있는 중국 항공모함 등을 의식해 두 시간가량 더 걸리는 항로를 택했다. 전 세계의 관심은 반영하듯 펠로시 의장 일행이 탑승한 미 공군 소속 보잉 C-40(SPAR19)의 항로를 추적한 사람은 292만 명에 달했다.
블룸버그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펠로시 의장은 이날 아침 대만 주재 미국 대사관 역할을 하는 주대만미국협회(AIT) 직원들과의 조찬 모임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그는 이날 내내 대만에 대한 지지와 인권을 강조하며 중국 정권을 압박하는 데 주력했다.
펠로시 의장은 이날 오전 9시께 대만 의회인 입법원을 방문해 차이치창 입법원 부원장을 만나 “미국의 대만 지지는 초당적”이라면서 “우리는 대만을 친선 방문한 것이며 지역의 평화를 위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후 총통부로 자리를 옮겨 차이잉원 대만 총통을 만나 면담과 오찬을 했다. 펠로시 의장은 “미국은 항상 대만과 함께할 것이라고 굳건히 약속해왔다”며 “오늘 우리 대표단은 미국이 대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하고자 여기에 왔다”고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차이 총통은 펠로시 의장에게 대만과 미국 간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외국인에 주는 최고 등급 훈장인 특종대수경운(特種大綬卿雲)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펠로시 의장은 대만의 가장 굳건한 친구“라면서 “대만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보여주며 대만을 방문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후 일정에는 중국 정부가 민감하게 여기는 인권과 반도체 관련 회동이 담겼다. 펠로시 의장은 신장위구르자치구와 홍콩 출신 중국 민주화 인사들과 만났으며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TSMC의 류더인 회장과도 만나 미국 공장 증설에 대해 논의했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중국 정부는 전날 심야에 니컬러스 번스 주중 미국대사를 초치해 “극도로 악랄하다”고 항의하고 오는 4∼7일 대만을 포위하는 실사격 훈련 개시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날 저녁에는 대만 총통부 홈페이지는 역외에서 사이버 공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장애가 발생했다.
경제적 보복 조치도 나왔다. 중국 해관총서는 펠로시 방문 전날인 1일 대만의 100여 개의 기업의 식품 수입을 금지한 데 이어, 3일에는 대만산 감귤류 과일, 냉장 갈치, 냉동 전갱이의 수입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중국 상무부도 대만에 대한 천연 모래 수출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전기차 배터리 업체 중국 CATL은 당초 수주 내로 발표 예정이었던 북미 공장 설립 발표 계획을 올해 9월이나 10월로 미뤘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과 관련해 미·중 관계가 민감한 시기라는 점을 고려한 데 따른 결정으로 풀이된다.
대다수 전문가는 중국의 보복 조치가 미국과의 전면 충돌로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우발적 충돌이나 도발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하다. 블룸버그는 중국이 대만에 대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회색지대(불법·합법 여부가 모호한 영역)’ 전술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하면서 앞으로 이 같은 전술에 대응하는 것이 미국의 가장 어려운 안보 과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