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호 국제경제부장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역사에 길이 남는 총리가 됐다. 영국 사상 최초 40대 여성 총리라는 영예를 얻은 지 45일 만인 20일(현지시간) 사임을 발표하면서 영국 역사상 최단 기간 재임 총리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된 것이다.
무리하게 감세안을 추진해 영국은 물론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벌로 집권 보수당 의원들마저 조기 퇴진 움직임에 나서면서 결국 사임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심지어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불안에 자국에서 인기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마저 최근 “그의 정책이 실수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 있었을 것”이라며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고 비꼴 정도로 트러스 총리는 사임하기 전에 전 세계의 놀림거리가 됐다.
그러나 트러스 총리를 동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겪고 있는 망신살은 어설픈 감세안으로 영국은 물론 전 세계 경제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은 업보다.
트러스의 뻘짓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절대 과장이 아니다. 영국 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파운드화 가치는 사상 최저치로 추락하고 도미노처럼 영국 연기금이 붕괴될 위기에 놓였다. 운용자산이 1조 파운드에 달하는 영국 연기금이 파산하면 2008년과 같은 사태가 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사실 영국이 아니어도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트러스 총리가 얼마나 짧은 시간에 글로벌 시장을 혼란에 빠뜨렸는지를 상기해보자. 감세안 발표에서 제러미 헌트 신임 영국 재무장관의 정책 철회에 이르기까지 불과 3주 정도였다.
트러스 총리가 욕먹어도 싸지만, 그의 허튼짓에 세계 지도자들이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영국 신임 총리는 이제 반면교사의 대표적 사례가 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교훈을 꼽자면 세계 리더들이 자신의 야망을 대표하는 ‘키워드’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트러스 총리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감세안을 들고나온 배경에 있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바로 ‘마거릿 대처’다. 대처를 추앙하기로 유명한 트러스가 대처의 대표 정책인 감세안을 들고 나온 것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알다시피 망했다.
그런데 데자뷔가 느껴지지 않는가. 마오쩌둥과 같은 반열에 올라서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구소련의 영광’을 꿈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말이다. 두 강대국 지도자는 제발 트러스 총리로부터 반드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