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금이냐, 사업확장이냐…“중국 외 지역 투자가 최선”
미국 보조금ㆍ중국 사업 중 갈림길 서
美 정책 기조에 대응 전략 마련 쉽지 않아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심화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사실상 미국의 보조금 지원이나 중국에서의 사업 확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만큼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2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 시행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고 진단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최근 발표한 반도체 지원법 세부 규정에서 미국의 보조금을 받은 기업들의 중국 내 생산 활동을 제한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 내 반도체 생산능력을 5% 이상 확대할 수 없다. 사실상 기업들이 미국과 중국 중 하나의 시장을 선택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에 놓인 셈이다.
이번 제한은 이미 중국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어 막대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동아시아 기업들에 특히 어려운 결단이 될 전망이라고 WSJ는 강조했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메모리칩 공장, 쑤저우에는 반도체 패키징(후공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우시에 D램 메모리칩 제조시설을 가동하고 있고, 3년 전에는 인텔로부터 다롄의 낸드플래시 메모리칩 공장을 인수했다.
미국 정부의 요구는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상무부는 전날 반도체 보조금을 신청하는 기업들에 생산시설의 수익성 지표를 단순 숫자가 아닌 엑셀 파일로 내라고 요구했다. 특히 예시로 제시한 모델에서는 영업 기밀에 해당할 수 있는 웨이퍼 수율까지 입력하도록 했다. 필요 이상의 과도한 정보를 요구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이번 제한과 관련해 “중국과 경제적으로 분리하려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미 반도체 제조 장비 분야를 시작으로 미·중 대립에 따른 단절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50%, 네덜란드는 44% 급감했고 일본은 16% 줄었다. 같은 기간 중국 이외 지역에 대해서 미국이 10%, 일본이 26%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지난해 전체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은 전년 대비 15% 줄어든 347억 달러(약 45조892억 원)로 3년 만에 감소세를 기록했다. 올해 1~2월 반도체 장비 수입도 전년 대비 21% 쪼그라들었다. 같은 기간 반도체 수입액 역시 25% 급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31일부터 시작될 보조금 신청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기밀사항까지 요구하는 미국의 과도한 조건에 기업들이 신청을 유보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보조금 지원을 신청하는 것이 맞지만, 반도체 생산과 관련한 기밀사항을 내어주면서까지 받는 것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정부 정책의 기조를 고려할 때 자구책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 팀장은 “미국이 대(對)중국 견제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주도적으로 대응 전략을 짤 방안은 극히 제한적”이라면서 “최근 용인에 300조 규모의 메가 클러스터를 만들며 국내에 산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한 것이 그나마 미국 정부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위민복 대신증권 연구원은 “현재로써는 기업들이 중국 이외에 다른 지역에 투자함으로써 경쟁력 훼손을 방지하려고 하는 것이 최선”이라면서 “중국 공장에 대한 투자 자체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0월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중국 수출통제 조치를 1년간 유예받은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올해 유예가 연장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중국 반도체 사업이 철회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연 팀장은 “유예가 종료된다면 현재 중국 공장에서 하고 있는 수준의 생산조차 불가능해질 것”이라면서 “이 경우 궁극적으로 중국 사업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운호 IBK투자증권 연구위원도 “자사 중국 법인 중국 공장에다가 장비를 출하할 수 없게 될 경우 원가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