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고려 않은 개발, 대응 규정
위기에 강제 대피 아닌 권고만
지자체 권한 강화 법 개정 필요
최근 한반도를 강타한 기록적인 폭우로 저지대 침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응 체계 부족과 인명 피해 규모를 고려할 때 산사태 우려가 더 심각하다고 입을 모은다. 평년을 훨씬 웃도는 누적 강수량으로 지반이 심각하게 무른 데다가 추가 강우까지 예보돼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신속하게 징후를 발견해 보강공사를 서둘러야 하고, 대피 관련 지방자치단체 권한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7일 기상청에 따르면 6월 25일부터 지난 16일까지 누적 강수량은 수도권 421mm로, 평년(231mm)을 훨씬 웃돌았다. 남부지방은 평균 528mm로, 역시 평년(243mm)의 두 배를 넘어섰다. 한반도 전역이 비에 흠뻑 젖은 것이다. 정체전선에 더해 저기압도 영향을 주면서 19일 오전까지 또다시 ‘많고 강한 비’가 예보됐다. 충청·남부지방·제주 100~200㎜, 경기남부·강원남부내륙·강원남부산지·울릉도·독도 30~100㎜, 서울·인천·경기북부·강원 10~60㎜의 비가 추가로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계속된 비로 산사태 발생 가능성도 대폭 증가했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시간당 30mm, 하루 150mm, 누적 강수량이 200mm를 넘어설 경우, 산사태 위험이 가파르게 증가한다고 분석한다. 유송 산림과학원 연구사는 “지금까지 누적된 강수량만으로도 전국 어느 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오후 4시 기준 산림청에 접수된 산사태는 전국 총 196건이다.
한국은 전체 국토에서 산지 비중이 70%에 달한다. 고속도로, 터널 등 개발로 산사태 위험이 높고, 강원도(석회암), 포항·경주(퇴적암) 등 약한 암반으로 이뤄진 지역은 특히 취약하다.
문제는 인위적 개발 과정에서 활용하는 절취면 안전경사 기준이 산지 지형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반화돼 있다는 점이다. 암반의 종류, 지형 특성에 따라 위험도가 다른데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산사면을 깎는다는 의미다. 서울 우면산, 부산 황령산 등 과거에 발생한 산사태 대부분의 원인이 이 문제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임종철 부산대 토목공학과 명예교수는 “공사 전 암반 균열방향을 면밀하게 분석해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비용 문제로 전 단계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산사태 대응 시스템의 실효성도 문제로 지적된다. 취약지역 판정표 자체가 개발행위에 따른 위험도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박창근 가톨릭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개발 행위가 있을 경우 산사태 위험이 증가하는 데도 불구하고 위기 경보 발령 기준이 되는 평가항목에 개발행위에 따른 위험지구 평가가 빠져 있다”며 “경보 발령만 할 뿐, 행동 강령 등 구체적인 지침도 전무하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나무줄기가 휘었다거나 물이 용출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등 위기 징후를 파악하는 노력을 확대하고, 신속하게 보강 공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지자체의 권한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해외의 경우 일정 정도 비가 쏟아질 경우 대피를 강제할 권한이 지자체에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권고에 불과하다. 계곡 등 산사태 발생 가능 지역에서 여러 이유로 대피를 하지 않더라도 이를 강제할 권한이 없다는 얘기로, 지자체 권한을 명시한 법률 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편 13일부터 이날 오전까지 전국 곳곳에 쏟아진 폭우로 지하차도 침수, 산사태 등이 발생하면서 사망·실종자 수가 49명으로 불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 기준 폭우로 인한 사망자는 경북 19명, 충북 16명(오송 13명), 충남 4명, 세종 1명 등 총 40명이다. 실종자는 경북 8명, 부산 1명 등 9명이다. 부상자는 충북 13명을 비롯해 총 34명이다. 미호강 제방이 터지면서 터널 전체가 침수된 청주 오송지하차도, 산사태로 마을이 초토화된 경북 예천 등을 중심으로 수색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사망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번 호우로 15개 시도 112개 시군구에서 6258세대 1만608명이 일시 대피했고, 농작물 피해도 2만6933.5㏊로 늘었으며, 농경지는 180.6㏊가 유실·매몰·파손됐다. 가축은 총 57만9000마리가 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