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중남미는 왜 국가경쟁서 밀려났나

입력 2023-10-26 05:00

  • 작게보기

  • 기본크기

  • 크게보기

과보호된 제조업 경쟁력 뒤처져
산업쇠퇴로 일자리 감소 가속화
양극화 심화…재분배정책 실패

지난 수십 년간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끌어 온 산업은 단연 제조업이다. 그렇다면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올라선 우리 경제에서 제조업은 역할을 다한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제조업이 중요하다. 전 세계가 ‘제조업 부흥’을 외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리지 않고 제조업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와 고용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 18세기인데, 왜 아직도 많은 국가가 제조업의 쇠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지 의아할 수 있다. 제조업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제조업이 갖는 고유한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제조업은 원자재 기반 산업이나 서비스업에 비해 기술 발전과 노동 생산성이 빠르게 향상되며, 이러한 긍정적 효과가 다른 경제 부문으로 퍼져나가는 경향을 보인다. 게다가 제조업은 1차산업이나 3차산업에 비해 다양한 숙련도의 노동자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고용 탄력성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정도의 경제 수준을 달성한 국가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술의 발전과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제조업 중심 경제 구조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일찍이 산업화를 이룬 서방 선진국은 이미 몇십 년 전부터 탈산업화를 경험했다. 하지만 서비스 부문은 제조업과 비교하면 분야별로 임금과 생산성에 큰 차이를 보이며, 고용 창출 효과도 제조업에 비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주요국이 제조업에 집착하는 이유다.

2000년대 후반 전 세계를 덮친 미국발 금융위기에서도 제조업의 중요성은 다시금 조명됐다. 제조업 기반이 강한 독일은 빠르게 충격을 흡수하고 성장률을 회복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제조업이 강한 나라가 경기회복이 빨랐다. 반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굳어진 세계 저성장 국면에서 제조업이 쇠퇴하던 나라에서는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경제 전반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자, 많은 선진국에서 고용과 소득 분배가 악화했다.

다양한 숙련도를 가진 노동자에 양질의 일자리를 공급하며 불평등 완화 역할을 하던 제조업이 쇠퇴하자, 많은 저숙련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거나 저임금·저생산성 서비스 일자리로 밀려나며 소득 분배 지표가 악화했다. 중산층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제조업의 쇠퇴로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노동자에게 제조업을 부흥시키겠노라 약속했다. 세계화 논리를 비판하고, 자국 우선주의 구호를 앞세웠다. 이들은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층이 되어 그를 백악관으로 보냈다.

중남미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제조업과 연관되어 있다. 중남미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해결되지 않는 것도 제조업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고 빠르게 쇠퇴한 데에서 어느 정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역내 주요국은 일찌감치 제조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국가 주도로 야심 차게 제조업을 육성했지만, 1990년대 무역 자유화가 본격화되자 국가의 과도한 보호 아래 있던 제조업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브라질과 멕시코 정도만이 지금까지 건실한 제조업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제조업이 충분한 고용이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국가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중남미의 내수 시장으로 수입 제조업 제품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제조업 육성 국면에서 국가로부터 특별대우를 받던 중남미산 제조업 제품은 국내에서나 세계 시장에서나 경쟁력이 없었다.

제조업의 이른 쇠퇴는 중남미 국가의 소득 분배 지표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저소득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주던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자 안 그래도 불평등으로 악명 높던 사회는 더욱 양극화됐다. 2000년대 높은 원자재 가격이 이어지며 경제성장률이 좋았던 때는 정부의 강력한 재분배 정책으로 불평등 문제를 풀었다.

하지만 양질의 일자리가 없는 재분배 정책은 지속되기 어렵다. 원자재 가격이 내려가자 소득 분배 지표의 개선은 요원해졌고, 경제 부문의 양극화는 정치 부문의 양극화로도 이어졌다. 중남미에서 제조업의 쇠퇴를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